
북촌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면 사랑방으로 불리는 작은 공간이 있다. 보통의 한옥 양식을 따라 작은 정원에서 이어지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지만, 막상 가만히 앉아 있자면 북촌의 다른 곳들과는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낮은 대문을 통해 집안에 들어서자면 돌담과 건물로 둘러싸인 아늑함이 먼저 시작되다가, 마루위를 올라 안방에 앉아 둘러보자면 이웃하는 한옥 지붕을 켜켜이 시선 아래에 두고 멀리 도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위요와 개방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묘한 수준의 편안함을 느끼며, 이 공간에서만의 매력적인 위로를 얻어가곤 한다.
북촌의 수 많은 한옥들 가운데 유독 이 사랑방이 나에게 매력적인것처럼 비슷한 구성의 공간이라도 그 의미가 다르다. 같은 크기의 광장인데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고, 비슷한 위치에 놓인 벤치인데도 유독 사용되지 않는 곳이 있다. 다시 조경가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떤 형태가 아름다운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공간을 어떻게 읽고, 움직이고, 머무는가를 이해해야 비로소 공간의 작동 방식을 설계할 수 있다.
환경심리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해왔다. 카플란 부부(Rachel & Stephen Kaplan, 1989)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를 설명하면서 “일관성(coherence), 식별 가능성(legibility), 복잡성(complexity), 미스터리(mystery)” 라는 네 가지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는 주변의 환경을 일관되게 이해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더 알아보고 싶은 여지도 원한다는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요구가 매력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공간이 너무 단순하면 지루하고, 너무 복잡하면 읽기 어렵다. 좋은 공간은 그 사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질서와 탐색할 이유를 함께 만든다.
조경가가 동선을 설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한 번에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정원 ’Slow Garden‘ 은 길을 따라가면서 마운딩 뒤로 다음 공간을 숨기거나, 낮은 식재로 시야를 부분적으로 차단하면서 방향을 틀어야만 새로운 장면이 나타나도록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장치가 아니라 사람이 공간을 한 번에 소비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이해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 K-디자인 어워드 2024 위너 수상작 - Slow Garden >
카플란이 말하는 네 개념 중 ‘미스터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현재의 장면이 다음 장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감추면서도, 더 들어가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용자의 기대 심리를 자극하는 ‘미스테리’는 실제 연구에서도 환경 선호와 관련된 중요한 변수로 반복적으로 검토되어 왔다. 조경가는 공간 구성에 있어 이를 좀 더 세련되게 받아들인다. 숨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서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 이는 공간을 연결하는 동선의 설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처음에는 공간의 성격을 소개하고, 이동을 따라 새로운 정보를 조금씩 추가하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시야를 열어 전체를 인식하게 한다. 우리가 조절하는 것은 길의 형태가 아니라 경험과 정보가 들어오는 순서다.
이 문제는 내가 설계한 정원 ‘Garden Whispers’ 에서도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정원에는 높이가 다른 수백 개의 흰색 금속 기둥이 사용되었다. 기둥은 일정한 패턴으로 세워진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그 사이를 걸으면 같은 풍경이 반복되지 않는다. 어느 위치에서는 외부 풍경이 열리지만, 다른 위치에서는 기둥과 식재가 시야를 좁힌다. 도면에서는 단순한 평면 패턴처럼 보였던 요소가 현장에서는 시야의 폭과 깊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됐다. 디에이치 방배 아파트의 조경 공간에 자리한 정원 Garden Whispers 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흥미로운 피드백은 여러개의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시선의 열고 닫음, 그리고 이를 통해 보여지는 공간에 대한 이해와 미스테리에 관한 호기심이었다. 특히, 기둥은 조형물이면서 경계이고, 경계이면서 시선을 조절하는 장치가 되고, 나무 역시 녹색을 만들 뿐 아니라, 시야의 깊이를 조절하는 요소가 된 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 K-디자인 어워드 2025 위너 수상작 - Garden Whispers >
시선의 열고 닫음에서 기인하는 ’미스터리’는 공간의 ‘위요감(Enclosure)’ 과도 깊은 관계를 갖는다. 흔히, 주변이 적당히 감싸져 있으면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하지만, 너무 폐쇄적이면 불편하다. 공간은 이용자가 보호받는 느낌과 동시에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Jamitan. Crimson blossomed pond’ 는 적확한 위요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붉은 꽃의 배롱나무, 동백나무를 주제로 하는 연속되는 정원은 바깥에서의 시선을 차단하는 수경시설로 거의 완벽하게 닫혀있음과 동시에, 줄 맞춰 식재된 나무들 사이를 통해 시각적으로 막힘없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을 ‘어느 정도 보호하되 동시에 적절히 열어두는 것’은 그것의 구성에 따라, 기둥 뿐 아니라 낮은 시설물이나 수목의 수관, 식재의 높이, 지형의 단차와 같은 다양한 요소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적당한 위요감은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와 그 너머에 남겨두는 범위‘까지 정밀하게 설계하며,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앉을 매력’를 제안한다. 윌리엄 H. 화이트(William H. Whyte, 1980)는 도시의 작은 공공공간을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디에 앉고, 어디에서 모이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기록했다. 그는 이상적으로 ‘좋은 공간’을 정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관찰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단순히 배치된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들은 적절한 캐노피나 위요감이 있는 공간적 조건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 K-디자인 어워드 2025 위너 수상작 - Jamitan. Crimson blossomed pond >
적절한 공간적 위요감을 바탕으로 사람들과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었을 때, 공간은 편안함과 매력을 동시에 소유한다. 때문에 좋은 공간은 단순히 의자의 숫자부터 셈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공간은 이용자의 시선을 얼마만큼 열고 닫고 있는가, 이용자가 앉았을 때 무엇을 보며, 주변의 사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햇빛과 그늘은 어떻게 바뀌며, 주변의 소리는 어떠한가. 혼자 있고 싶은 사람과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먼저다. 물론, 유일하게 자연을 다루는 디자이너로서 ‘조경가‘에게 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있어 ’자연 요소’를 간과할 수 없다. 사람과의 소통 가능성에 더해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경험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로저 울리히(Roger Ulrich, 1984)의 연구를 필두로 자연이 주는 공간의 편안함과 매력에 대한 효과는, 이미 증거 기반의 다양한 치유 정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어 왔다. 결국, 좋은 공간의 매력은 하나의 요소로 설명하기 어렵다. 질서가 있어야 방향을 읽을 수 있고, 적당한 복잡성이 있어야 탐색할 이유가 생긴다. 시야가 열려야 주변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한눈에 드러나면 이동할 이유가 없어진다. 머물 공간에는 공간적 위요감 뿐 아니라, 의자, 햇빛, 그늘, 시선, 소리, 주변 사람과의 거리 같은 조건이 함께 작동한다. 그리고 양질의 자연 요소는 공간의 생동감을 더한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용자의 행태도 마찬가지로 여러 복합적인 요소의 합체이다. 좋은 조경가는 단순히 ’독특한 디자인‘을 넘어 ‘사람의 행동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을 제안한다. ‘사람을 잘 통제‘하기 보다는 ’사람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제안한다. 조경은 그 디자인과 시공이 완성된 후,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마련이고 이 공간에서 경험되며 쌓여가는 각 사람들의 기억들이, 결국에는 조경가가 처음 접하게 되는 공간의 레이아웃 위에 켜켜이 쌓아올리는 오래된 미래의 풍경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