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런던의 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혹은 글로벌 제조사의 디자이너들과 어울리다 보면 종종 디자인과 관련된 질문들과 마주하곤 했다. “한국적 디자인이란 정확히 어떤 거야?” “K-POP이나 K-드라마처럼, 한국 산업디자인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조형 언어나 미학이 있어?”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세계 디자인사를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각 국가의 명확한 상징들이 어느 정도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라고 하면 자연에서 온 따뜻한 원목, 절제된 곡선, 그리고 따뜻한 휴머니즘과 기능성을 즉각 떠올린다. ‘독일 디자인’을 생각하면 디터람스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 엄격한 공학적 질서, 그리고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절제된 조형미가 떠오른다. ‘일본 디자인’은 특유의 정갈함과 비움의 미학, 그리고 소재 본연의 숨결과 촉감을 집요하게 살려내는 오가닉한 감성이 잔상으로 남는다.

한국 제조업의 메카,서울 을지로에서 이어져 온 장인들의 모습
< 이미지 출처 : by 청계천 을지로 보존연대 >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인가? 해외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동안 이 질문은 늘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당시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이란 고작해야 한옥의 부드러운 처마 선, 조선 백자의 담백하고 소박한 여백, 혹은 전통 오방색이나 단청의 화려함 같은 교과서적인 키워드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내뱉으면서도 속으로는 늘 유쾌하지 않은 찜찜함이 남았다. 정작 현대 한국의 빌딩 숲과 거리에서, 그리고 우리가 매일 손에 쥐고 사용하는 최첨단 제품과 서비스에서 그런 고전적인 모티프를 그대로 담고 있는 디자인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의 최전선에서 초 단위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대 한국의 산업디자인을 설명하기에, 옛것의 단순한 복제나 관념적인 전통의 재현은 너무나 한가롭고 동떨어진 해답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한국의 산업 현장과 대학 스튜디오로 돌아와, 수많은 제품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고 직접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한국적 디자인의 정체성’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특정한 형태나 양식, 혹은 전통적 패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산업디자인의 본질과 뿌리는 결국 ‘제조업’과 ‘생산 체계’에 있다. 한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가전과 자동차, 그리고 모빌리티와 IT 기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 제조 생태계를 아주 좁은 도시 공간 안에 극도로 밀도 높게 쌓아 올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국가다. 서구 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산업혁명과 바우하우스를 거치며 차근차근 단계별로 다듬어온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아르데코 같은 디자인 철학을 한국은 불과 몇십 년 만에 폭발적인 속도로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흡수했다. 이 지독할 정도의 압축 성장과 빠른 속도전 속에서 한국 디자인만의 독보적인 생존 방식이자 고유한 DNA가 태어났다. 그것은 바로 특정한 스타일이나 순수성에 고집스럽게 갇히지 않고,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이질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섞고 자기 것으로 빠르게 가공해내는 ‘유연한 재해석의 힘’이었다.


삼성전자 폴더블폰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히스토리월’ 기술과 제품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 Samsung News Room >
우리는 서구의 엄격하고 차가운 미니멀리즘 조형 안에 동양 특유의 촘촘하고 세심한 기능과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꽉 차게 욱여넣는 독특한 고밀도 설계를 터득했다. 특정한 스타일에 고집스럽게 매이지 않는 유연함은 곧 한국 디자이너들만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차갑고 딱딱한 최첨단 전자제품에 따뜻한 가구의 나무나 천의 질감을 과감하게 결합하고, 차가운 자동차 실내 공간에 첨단 디지털 디스플레이 화면과 전통 공예가 주는 은은한 촉감을 자연스럽게 함께 배치한다. 세계의 최신 문물이나 낯선 기술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여, 이를 우리 특유의 감각과 고밀도 맥락으로 재가공해 전혀 새로운 형태와 경험으로 제시하는 순발력. 이것이 바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산업디자인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역동성이다. 이러한 유연함은 한국 특유의 독특한 사용자 문화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눈높이가 높고, 트렌드 변화에 순식간에 반응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존재다. 새로운 기술과 기기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쓰기 불편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매섭게 피드백을 던지는 사용자들 덕분에 한국의 제품들은 그 어떤 국가보다 치열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그 결과 한국의 산업디자인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디지털 서비스와 물리적 하드웨어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쓰임새를 하드웨어 조형 안에 가장 빠르고 민첩하게 반영하는 독보적인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누군가 다시 나에게 “한국적 디자인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은 하나의 고정된 ‘모양’이나 ‘양식’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유행과 기술, 이질적인 문화 요소를 두려움 없이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정반대의 요소를 과감하게 섞어 세상에서 가장 쓰기 좋고 감각적인 언어로 재편집해내는 ‘유연하고 빠르며 솔직한 태도’ 그 자체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한옥의 전통과 현대적인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
< 이미지 출처 : Hyundai Card DIVE >
사물의 미세한 조형과 형태부터, 손끝에 걸리는 물리적 마찰과 촉감의 실체, 그리고 기술이 가파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디자인이 가야 할 방향까지.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AI가 픽셀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될수록, 역설적으로 고정된 양식에 매여 있지 않은 유연한 하이브리드 감각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AI로 정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과거의 상식이 파괴되는 요즘, 한국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디자인과 AI 시장에 대응하고 또 선도해나가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아틀라스(Atlas)’ 제조업을 기반으로 AI와 로봇 산업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의 모습
< 이미지 출처 : Hyundai Motor Group >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져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디자인이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 세계 어느 기업을 보더라도 한국인 디자이너가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기업은 한국적 디자인이 탐나서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디자인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회사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빠르게 이해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자연스럽게 융합해내는 능력을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몸에 익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거대한 혼란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섞고 사람의 오감에 맞춰 빠르게 재해석해내는 한국 산업디자인의 유연한 태도야말로 기술과 사람을 가장 따뜻하게 이어주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