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인 천국에 간 디자이너 저자,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우리는 지금 최첨단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과거 상상 속에서나 그리던 풍경들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우리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중이다. 최근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테슬라의 자율주행 차량, ‘사이버캡(Cybercab)’의 등장 역시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첫선을 보인 테슬라 로보택시(Tesla Robotaxi)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라 믿었던 것들을 과감히 지워버렸다. 운전석은 물론, 차를 조율하던 핸들과 페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심플한 디스플레이 화면 하나만이 승객을 맞이한다. 운전의 의무에서 해방된 승객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거나, 영화를 감상하고, 휴식을 취한다. ‘운전’이라는 필수가 사라진 자리에 ‘자유’라는 새로운 가치가 들어찬 것이다.
이러한 혁신의 문법은 낯설지 않다. 과거 아이폰이 등장하며 물리적인 휴대폰 키보드를 화면 속으로 지워버렸던 것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기술의 혁신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단순하고 심플하게 재디자인 re-design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지금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관습과 요소들이 지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싹트는 지점이 되고 있다.


< 완전자율주행 택시 테슬라 사이버캡 ㅣ이미지 출처 : teslahubs >

< 흥미로운 구성으로 가득한 미니 Mini의 실내인테리어 ㅣ 이미지 출처 : unsplash >
하지만 사용자 경험(UX) 측면에서 바라보는 득과 실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심플함과 미니멀리즘이 안겨준 혁신은 분명 커다란 효율을 극대화하지만, 역설적으로 기기를 직접 조작하고 작동시키는 고유의 ‘재미’를 지워버린다. 특히 운전 driving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하드웨어는 갈수록 간소화되고 대부분의 기능이 소프트웨어 속으로 들어간 결과,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은 사라지고 매끈한 화면 위를 터치하는 동작만 남았다. 편리함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이 단조롭고 심심한 경험 boring experience은, 기술이 진보할수록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되묻게 만든다.

< 뒷 유리가 사라진 폴스타 5 시리즈, 후방 카메라가 그 기능을 대신한다. ㅣ이미지 출처 : polestar >

< 주행시에는 사라지는 측면 도어 핸들 ㅣ 이미지 출처 : unsplash >
흥미로운 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기능을 터치스크린 속으로 통합하던 자동차 업계가, 최근 주요 기능 버튼을 다시 물리적 인터페이스로 빼내며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있는 것. 물론 안전을 위한 직관적인 인터랙션이 필수적이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운전이라는 경험이 선사하는 특유의 손맛과 '재미'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 역시 한몫했을 것이라 가늠해본다.


< 2007년 발표된 애플의 첫 아이폰과 최근 출시된 폴더블 아이폰 듀오 ㅣ 이미지 출처 : apple >
휴대폰 트렌드 역시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과거 폴더폰과 슬라이드폰이 시장을 주도하던 시절, 기기를 접고, 꺾고, 밀어 올리는 동작 방식은 다양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도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기에, 긍정적인 의미에서 훨씬 도전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터치스크린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하드웨어 디자인은 극도로 단순해졌다. 밋밋한 다면체 형태에 갇힌 탓에, 로고를 가리고 나면 어느 브랜드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근 들어 접히는 디스플레이 기술을 기반으로 한 폴더블폰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직관적인 감각과 역동적인 인터랙션을 다시 불러오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앞서 언급한 자동차 산업의 최근 트렌드와도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더 나은 경험을 위한 선택들
지금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서 있다. 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정확히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수많은 시도와 수정, 그리고 시행착오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술의 현장을 들여다보자. 터치 인터페이스, 자율주행, 음성인식, AI 디바이스, 증강현실(AR)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인류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펼쳐지는 거대한 실험이자 진화의 과정이다. 어떤 기술은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한동안 잊혔다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재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본질적인 통찰이 있다. 사용자 경험(UX)의 영역은 결코 단순한 ‘효율성(Efficiency)’ 하나만으로 평가하거나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성능, 고사양, 고스팩…사용자가 찾는 것은 더 이상 이런 것만은 아니다. 극단적인 효율성보다는 오히려 더 감도있는 ‘경험’을 기대하고 원한다. 그리고 이 경험의 영역에는 수치적이고 계산적인 접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재정의되는 디자이너의 역할
바야흐로 디자이너에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량이 요구되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첫째, 더 나은 경험을 설계하기 위해 '취함'과 '버림'을 영리하게 선택하는 능력이다. 앞선 예시처럼 최신 기술과 혁신만을 맹목적으로 좇다 보면 자칫 너무 심심하고 지루한 결과물을 얻거나, 반대로 사용자가 적응하기 힘든 복잡한 디자인에 도달하기 십상이다. 어떤 요소를 더하고 어떤 요소를 과감히 덜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조율의 감각,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예리한 통찰력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둘째, 디자이너는 탁월한 '가이드(Guide)'가 되어야 한다. 기술과 사용자 경험, 그리고 미학을 정교하게 조합해 사용자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해야 한다. 사용자는 종종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디자이너가 정밀하게 조향하여 제시한 결과물을 거치고 나서야 "오, 이렇게 하니까 정말 편리하네. 훨씬 좋아졌어." 라고 말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감탄은 언제나 직접 경험해 본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법.
이제 우리는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기술의 양적 발전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사용자가 느끼는 “경험의 진화”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