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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 | 인덕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생활 속 시각디자인 저자,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방탄소년단 RM은 지난달 경주 APEC CEO 서밋에서 “K-팝의 힘은 여러 재료가 어우러진 비빔밥과 같다”라고 말했다. 서구 음악 요소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미학과 정서, 그리고 제작 시스템을 융합한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K-팝이라는 것이다. RM의 이 비유는 매우 정교하다. 비빔밥은 각각의 재료가 고유한 맛과 색을 유지하면서도, 고추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조화를 이룬다. 나물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완성된 반찬이지만, 함께 비벼질 때 비로소 ‘비빔밥’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는 단순한 혼합이 아닌, 창조적 융합의 과정이다. 이 ‘비빔밥 철학’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의 시각디자인, 나아가 K-디자인 전반에 흐르는 DNA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 일본,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해왔다. 이러한 문화적 유연성과 창조적 수용력이 오늘날 K-디자인의 글로벌 경쟁력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세계적 음료 브랜드 코카콜라가 한글 로고를 새긴 ‘코카콜라 제로 한류’를 전 세계 36개국에서 한정 판매했다. 1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코카콜라가 자사의 상징적인 빨간 로고 대신 한글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그 자체로 K-컬처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케이팝과 팬덤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라는 그들의 설명은 K-컬처가 더 이상 특정 지역의 문화가 아닌, 글로벌 트렌드의 중심이 되었음을 방증한다. 더 흥미로운 점은 코카콜라가 단순히 한글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JYP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해 주제가 ‘라이크 매직’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 뮤직비디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K-디자인의 특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화면 속 타이포그래피는 한글의 조형미를 살리면서도 힙합과 EDM의 역동적인 리듬감을 시각화했고, 영상 디자인은 네온사인의 미래적 감각과 전통 한복의 색감을 자연스럽게 융합했다. 이는 특정 국가의 스타일로 규정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 언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더욱 흥미로운 사례다. OST 중 ‘골든(Golden)’이 영국 오피셜 차트 2위를 유지하며 22주 연속 차트에 진입했고, 총 3곡이 톱 100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작품이 2026년 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 자격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K-디자인의 완성도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입증한다. 작품 속에는 라면과 김밥 같은 K-푸드, 한복과 갓이라는 K-전통,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적 요소들이 결코 이국적 장식물로 소비되지 않는다. 전통 갓을 쓴 캐릭터가 현대적 의상과 결합될 때, 그것은 단순한 대비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미학적 조화를 만들어낸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25 대한민국 관광기념품 박람회’에서 한 외국인 관광객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온 호랑이나 갓 모양의 선물이 인상적이어서 이미 몇 개 샀다”라며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애니메이션 속 디자인이 실제 상품으로, 그리고 문화 콘텐츠로 확장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성수동 에잇세컨즈(8Seconds) 팝업스토어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콘서트장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에서 방문객들은 굿즈를 구매하고, 더피와 전통 갓을 활용한 포토존에서 자신만의 콘텐츠를 생산한다. 디자인이 소비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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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삼성물산 >

 

 

 

한 그릇의 라면과 드라마가 만든 문화 현상

 

2024년 뉴욕타임스는 ‘까르보불닭볶음면’의 품귀 현상을 보도하며 이를 “기존 인스턴트 라면의 틀을 깬 혁신”이라고 평가했다. 단순히 맛있는 라면이 아니라, 디자인적 사고가 만든 문화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 까르보불닭볶음면의 성공 요인은 명확하다. ‘까르보나라’라는 서구의 고급 요리 개념을 대중적인 인스턴트 식품에 접목시켰고, 기존 불닭볶음면의 강렬한 매운맛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크림의 부드러움으로 접근성을 높였다. 패키지 디자인의 블랙과 옐로우 컬러는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주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았고, ‘까르보(Carbo)’라는 서구적 표기와 ‘불닭’이라는 한국어의 조합은 그 자체로 문화적 융합을 상징한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성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즌 1이 공개와 동시에 93개국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딱지치기 같은 한국의 전통 놀이를 생존 게임이라는 현대적 장르와 결합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한국적 정서로 풀어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시각 디자인이다. 참가자들의 녹색 트레이닝복은 학교 체육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대량 생산 시스템 속 인간의 익명화를 상징한다. 관리자들의 기하학적 마스크는 한국의 전통 탈춤과 현대 미니멀리즘이 만난 디자인이다. 게임 공간의 파스텔 톤 컬러는 잔혹한 내용과 대비되며 불안한 동화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시즌 2와 시즌 3가 공개되면서 ‘오징어 게임’ 운동복은 단순한 의상을 넘어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핼러윈 코스튬으로, 스트리트 패션으로, 심지어 고급 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 아이템으로까지 변주되고 있다.

 

세계적 OTT 서비스 업체 디즈니+는 지난 11월 13일 홍콩 디즈니랜드에서 열린 ‘디즈니+ 오리지널 프리뷰 2025’ 행사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루크 강 아태지역 총괄 사장은 한국 콘텐츠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6편의 국내 오리지널 작품을 소개했고, “한국 콘텐츠 기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디즈니+의 이러한 결정은 K-콘텐츠의 디자인적 완성도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함을 의미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트로 시퀀스만 봐도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타이틀 디자인, 모션그래픽, 색감 활용에서 한국 작품들은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조형미를 살린 타이틀 디자인, 전통 색감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된 컬러 팔레트, 한국화의 여백 미학을 디지털로 재해석한 모션그래픽 등은 이제 K-드라마의 시각적 정체성이 되었다.

 

 

 

‘개성 없음’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디자인

 

“일본은 일본 스타일이 있고, 중국은 중국 스타일이 있는데, 한국 디자인은 개성이 없다”는 비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이는 K-디자인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일본 디자인은 ‘와비사비(侘寂)’로 대표되는 정적인 미학, 절제와 완성도를 추구한다. 무인양품의 미니멀리즘, 다도 문화에서 비롯된 여백의 미학, 장인 정신이 깃든 세밀함이 일본 디자인의 정체성이다. 중국 디자인은 화려한 색채와 웅장한 스케일, 용과 봉황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이미지가 특징이다. 수천 년 역사가 만든 문화적 자부심과 대륙적 스케일이 디자인에 반영된다.

 

그렇다면 한국 디자인은? 우리에게는 하나로 고정된 스타일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한국 디자인은 정체된 하나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 문화의 교차점에 위치해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온 지정학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자유롭게 오간다. 한복의 곡선미를 현대 패션에 적용하고, 민화의 해학을 캐릭터 디자인으로 재해석하며, 한글의 기하학적 구조를 그래픽 디자인의 모티프로 활용한다. 이는 단순한 절충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적 융합이다.

 

K-디자인의 진정한 힘은 ‘혼합의 미학’에 있다. 하지만 이는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다. 비빔밥을 생각해 보자. 각각의 나물은 제맛을 유지한다. 시금치는 시금치대로, 콩나물은 콩나물대로, 고사리는 고사리대로 고유한 식감과 풍미를 간직한다. 하지만 고추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 모든 재료가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K-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디자인 원리를 수용하되 한국적 정서를 잃지 않고, 첨단 기술을 활용하되 전통의 가치를 존중하며, 트렌드를 따르되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한다. 이러한 균형 감각이 K-디자인을 특별하게 만든다.

 

웹툰 캐릭터 디자인의 진화도 주목할 만하다. 초기 한국 웹툰은 일본 만화의 영향이 컸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한국 웹툰 캐릭터는 일본 만화처럼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미국 코믹스처럼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낸다. K-팝 아티스트의 비주얼 디자인은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다. 앨범 재킷, 뮤직비디오, 무대 의상, 콘서트 무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통합된 세계관을 구축한다. 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시리즈는 서구 심리학 이론과 동양 철학을 결합했고, BLACKPINK의 비주얼은 한국 전통 색감과 하이패션을 융합했다.

 

브랜드 파이낸스가 발표한 ‘2024 글로벌 소프트파워 지수’에서 한국이 193개국 중 15위를 차지하고, 국가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는 세계 톱 10에 진입한 것은 K-디자인의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특히 비즈니스 경쟁력과 글로벌 기업 브랜드 영향력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K-디자인이 단순한 문화적 현상을 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방탄소년단의 완전체 복귀가 전 세계 톱뉴스를 장식하고, ‘오징어 게임’ 시즌 2와 3가 역대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며, 한국의 김밥과 라면, 불닭볶음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현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음악, 영상, 식품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그 근간에는 ‘창조적 융합’이라는 K-디자인의 철학이 흐르고 있다.

 

K-디자인의 가장 큰 강점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 쉬는 영감의 원천이다. 한복은 런웨이 위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한글은 디지털 타이포그래피로 재탄생하며, 민화 속 호랑이는 NFT 아트가 된다. 이러한 유연성은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큰 장점이다. AI, 메타버스, NFT 같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애니메이션과 음악, 패션, 굿즈를 아우르는 통합 콘텐츠로 성공한 것도, 이러한 유연성과 창의성이 결합된 결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성수동의 팝업스토어에서,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서, 파리 패션위크의 런웨이에서, 도쿄 시부야의 스크린에서 K-디자인은 진화하고 있다. 비빔밥 한 그릇에 나물, 고기, 고추장, 참기름이 어우러져 완전히 새로운 맛을 내듯이, K-디자인은 다양한 문화적 재료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재해석해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정체된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살아있는 디자인 언어다. 이것이 일본의 미니멀리즘도, 중국의 화려함도 아닌, 오직 한국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의 방식이다.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성, 다양성을 포용하는 개방성. 이 세 가지가 만나 K-디자인은 21세기 글로벌 문화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이 여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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