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우리가 흔히 디자인이라고 하면 뛰어난 감각을 지닌 예술가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보기 좋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산업디자인에서의 디자인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체계적인 과정이다. 이 복잡한 과정을 가장 명확하게 시각화한 것이 2004년 영국 디자인 카운슬(Design Council)이 제시한 더블 다이아몬드 디자인 프로세스이며, 이는 두 개의 다이아몬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 Design Council (2004) The Double Diamond design process >
첫 번째 다이아몬드는 문제 영역에 대한 탐색과 정의를 다룬다. 빛을 모으듯 폭넓게 아이디어를 확장하며 사용자의 불만, 숨겨진 요구, 시장의 트렌드 등 다양한 단서를 수집하는 데스크 리서치가 이루어지며, 이를 발견(Discover) 단계라고 한다. 이후 수집된 단서를 분석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고, 정의(Define) 단계로 넘어간다. 이렇게 도출된 정의는 디자이너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나침반이 된다. 두 번째 다이아몬드는 해결책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 다이아몬드에서 규정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다시 확장하는 전개(Develop) 단계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는 한두 가지 아이디어에 갇히지 않고 기발하거나 비현실적인 아이디어까지 자유롭게 발산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아이디어 가운데 가장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을 선택하고 구체화하여 전달(Deliver) 단계에 이른다.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이 여정이 바로 디자인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그러나 오늘날 디자이너의 역할은 단순히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수준을 넘어선다. 디자인 씽킹의 확산과 더블 다이아몬드 프로세스의 진화를 거치면서 디자인은 이제 출시 이후의 영향까지 고민하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서 추가되는 것이 세 번째 다이아몬드, 임팩트(Impact)이다. 이 단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제품의 성공을 정의하고 성과를 추적하는 측정(Measure) 단계이며, 둘째는 장기적인 사회적·문화적 효과를 살피는 평가(Evaluate) 단계이다.

예를 들어 휴머노이드 로봇을 디자인한다고 할 때 단순히 구현과 출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영향을 남길지를 살펴야 한다. 이는 디자이너가 단순한 제작자를 넘어 사회적 책임과 비즈니스적 파급력을 동시에 고려하는 전략가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과 함께 눈부시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비자의 요구는 점점 더 세분화되고, 시장에 쏟아지는 정보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디자이너 한 사람의 직관과 경험만으로는 이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수많은 아이디어를 손으로 스케치하며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전통적 방식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혁신적 파트너, 생성형 AI이다. 많은 이들이 AI를 디자이너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지만, AI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가속하고 확장하는 촉매제에 가깝다.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역시 진화하며 문제 탐색 이전에 AI 학습을 위한 훈련(Train) 단계가 추가될 수 있다. 이제 AI는 데이터 분석부터 아이디어 발산, 최종 선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AI는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어떻게 활약할까. 자동차 디자인을 예로 들어보자. 첫 번째 다이아몬드인 ‘문제 정의’ 단계에서 과거에는 디자이너가 직접 시장조사 보고서나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해야 했지만 이제는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한다. 소셜 미디어의 실시간 대화, 온라인 커뮤니티의 수많은 게시물, 자동차 리뷰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디자이너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잠재적 요구를 찾아낸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으로 운전석이 ‘작업 공간’이 아닌 ‘개인적인 휴식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AI가 포착할 수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다이아몬드인 ‘해결책 개발’ 단계에서는 AI의 능력이 극대화된다. 디자이너가 ‘친환경적이면서도 공기역학적 효율이 높은 차체 디자인’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AI는 수만 가지의 차체 형태를 즉시 생성한다. 심지어 인간의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벌집 구조나 거미줄 같은 유기적 패턴까지 제안하며 경량화와 강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솔루션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개인화된 실내 공간’이라는 과제에 대해서도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 데이터를 반영해 다양한 내부 레이아웃, 소재, 조명 조합을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해 보여준다. 결국 AI는 더블 다이아몬드 프로세스 안에서 아이디어의 양과 질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고, 최종 선택 단계에서는 디자이너가 더 빠르고 정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 Midjourney / Krea AI 툴 활용해서 표현한 결과물 예시 >
과거의 디자이너가 홀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였다면 이제는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활용해 수많은 아이디어 중 최고의 것을 선택하고 그 안에 인간적인 감성과 미학적 가치를 불어넣는 ‘지휘자’ 혹은 ‘큐레이터’의 역할로 진화하고 있다. 더블 다이아몬드라는 디자인 프레임워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안에 채워지는 내용과 속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생성형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증폭시키는 새로운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로지텍(Logitech)에서 근무하던 시절만 해도, AI가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생각은 “흥미롭지만 우리의 일을 대체하진 못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불과 3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AI는 거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며 놀라움을 넘어 피로감을 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는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협업자로서 AI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디자인은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디자인 프로세스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해야 하며, 인공지능은 이미 그 중심에 들어와 있다. 중요한 것은 주도권을 AI에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관리자이자 조율자로서 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시대가 만들어낸 UX나 서비스 디자이너를 넘어, 시스템 전체를 설계하는 ‘시스템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역할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