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디자인의 유산과 트렌드: 수렴하는 형태로부터 전달되는 메시지
글로벌 오디오 시장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포착되었다. 덴마크 유명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B&O)의 신제품 이어버드와 한국 오디오 기술 기업 크레신(Cresyn)이 출시한 브랜드 ODDICT의 제품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디자인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짧게 돌출된 스템(stem), 귀에 편안히 밀착되는 타원형 형태, 미니멀한 표면 처리. 두 제품은 마치 동일한 디자인 철학으로부터 탄생한 듯 보인다. 이 유사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핵심 질문은 “서로 다른 유산을 가진 브랜드들이 어떻게 유사한 외형으로 진화되었는가?”와 “각 브랜드가 ‘형태’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이다.
디자인은 시대의 가치를 구현한다.
디자인의 역사를 돌아보면, 각 시대가 추구한 가치는 형태로 살펴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장인정신은 산업혁명의 획일적인 디자인에 맞서 장인만의 독특한 장식을 추구하였으며, 20세기초 바우하우스(Bauhaus)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원칙은 장식적 요소보다 기능적 필요성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사용자 중심 디자인(User-Centered Design)은 사용자 행동, 감정, 경험에 대한 응답이 외형으로 표현되었다.

< 왼쪽: Rober Heller – Airflow Fan / 오른쪽: Ludwig Mies van der rohe – Barcelona chair >
유산의 두 가지 유형: 브랜드 축적 VS 기술의 축적
‘유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랜 브랜드 역사를 떠올린다. B&O는 창립 이래 “음악 감상을 예술적 경험으로”라는 철학을 꾸준히 추구해왔습니다. 1960년대 Jacob Jensen이 디자인한 Beogram 4000 턴테이블부터 최근 출시된 Deoplay H95 헤드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에서 일관된 디자인 DNA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미니멀한 형태, 유기적인 곡선, 소재의 질감. 이것이 바로 “브랜드 유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유산”은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즉 “기술적 유산”이다. 크레신은 수십 년간 글로벌 오디오 브랜드의 파트너 제조사로 활동하며 수백, 수천가지 제품을 설계하고 생산해왔다. 이와 같은 유산은 어떤 형태가 최적의 음향을 선사하며, 착용감을 극대화하고, 배터리 효율을 높이는 지 등, 반복된 실험과 검증을 통해 기술적 데이터를 축적해왔다. 즉, 또 다른 의미의 브랜드 정체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 위에 쌓아올린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Cresyn – ODDICT (K-디자인어워드 2022 팀오브더 이어 수상) >
ODDICT TWIG PRO의 디자인은 바로 이 기술적 유산이 표현된 형태이다. 귀에 밀착될 수 있는 인체공학적 각도, 음향 챔버의 용적, 안테나와 제품인터페이스(UI)의 배치 – 각 요소는 수십 년간 축적된 기술 데이터에서 도출된 최적의 형태이다. 이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기능적 필요성이 형태를 결정하고, 그러한 형태 자체가 아름다움을 만드는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형태의 수렴 현상: 트렌드
이 사례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점이 있다. 크레신의 ODDICT TWIG PRO는 B&O의 신제품보다 먼저 출시되었으며 국내 디자인등록을 보유 중인 디자인이다. 그러나 두 제품의 유사성은 반드시 한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디자인의 모방여부의 관점 보다도, 오히려 이는 현대 디자인의 접근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동일한 제약환경 내에서, 다양한 브랜드가 자신의 유산을 기반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이 유사한 솔루션이 도달할 때, 이와 같은 현상은 디자인의 수렴적 진화의 힘을 보여준다. 인간의 귀 모양은 보편적이고, 블루투스 칩 크기는 표준화 되어있으며, 배터리 기술의 한계는 모든 제조업체가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미적 감각, 즉 미니멀하고 무광이며 유기적인 곡선까지 더해지면,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진 브랜드들이 결국에는 비슷한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 기술과 브랜드의 만남 – MSGM X ODDICT >
이와 같은 수렴 현상은 아시아 디자인의 잠재역량의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B&O는 익히 알다시피, 오랫동안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들은, 단순한 오디오 기기가 아닌, 공간을 예술적 존재감으로 채우는 “문화적 가치전환”을 이끌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브랜드 유산에, 아시아 디자인 또한 글로벌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와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즉, 아시아 디자인의 기술적 사양의 축적이 글로벌 무대에서 실현 가능한 독자적 “디자인 유산”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디자인은 지식재산의 축적과정이며, 각 디자인등록들은 그 여정의 한 지점들을 표시해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지식재산 경쟁우위는 1건, 1건의 등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답에 도달하는 과정 – 실험 데이터, 기술 노하우, 시장 이해도 – 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축적”은 각 브랜드의 고유한 유산을 형성하며, 다음 ‘혁신’의 밑거름이 된다. 디자인은 결과가 아닌, 결과로부터 미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렴을 넘어: 혁신의 조건
디자인의 수렴이 불가피하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혁신은 기존의 제약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제약 자체를 재정의함으로써 일어난다고 생각된다. 흥미롭게도, 기술적 유산을 가진 기업들이 이러한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수백가지 제품을 제조하며 축적된 데이터에는 ‘효과적인 것’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지 않은 것’도 포함하고 있다. 성공은 실패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제약의 경계를 돌파하지 못한 무수한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오히려, 새로운 혁신이라는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탈바꿈될 수도 있지 않을까? 브랜드 유산 기업이 “철학”과 “관점”의 변화로 혁신을 이룬다면, 기술 유산 기업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성공과 실패를 포함한)이 혁신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생각된다.
디자인의 미래: “형태는 가치를 따른다.”
서로 다른 브랜드가 유사한 디자인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현재 사회의 트렌드를 시사한다. 그러나 형태가 비슷할 때 소비자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할까? 바로 각 디자인이 지닌 가치를 구매한다고 생각된다. B&O를 선택하는 소비자는 세대를 거쳐 축적된 브랜드 철학, 즉 “음악을 예술로 경험한다”는 정체성을 구매한다. ODDICT를 선택하는 소비자는 기술적 우수성을 통해 쌓아온 신뢰도, “브랜드 프리미엄보다는 성능 그 자체”라는 약속을 구매한다. 같은 형태지만, 다른 유산으로부터 형성된 다른 “가치”. 소비자가 구매하는 것은 이어버드의 모양이 아니라 그 형태에 담긴 기업의 약속이자 가치이다.

< ”Open-Ended” Value Design – 김성훈, 에디터 >
디자인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점은 “형태는 시대가 추구한 가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유산은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동안 어떤 것들이 축적되었는지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 축적된 결과물을 얼마나 과감하게 재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음의 혁신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가치의 디자인(Value Design)은 다음의 질문을 하고자 한다. “당신의 디자인은 ‘어떤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가?”로부터, “당신의 디자인은 ‘어떤 장벽’들을 바꿀 것인가?. 디자인의 미래는 바로 수렴된 형태, 트렌드 속에서 “자신만의 질문”을 찾아낼 용기있는 자들이 쟁취할 것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