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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패션은 단지 옷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세계와 말하는 방식이다.”

 

수년 동안 한국 디자이너들은 ‘속도’의 렌즈로 설명되어 왔다. 빠른 시즌 전개, 빠른 수용, 빠른 글로벌 이슈. 그 서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 최근 시즌에는 더 조용하고 꾸준한 흐름이 뚜렷하다. 레이블들은 개념적 실험을 중심에 두고 인내심 있게 구축하며, 디자인을 ‘표면’이 아니라 언어로 다루기 시작했다. 작업은 리서치와 소재 테스트에서 출발해 소량 프로토타이핑을 거치고, 모듈형 패턴, 변형 가능한 구조, 드러나는 구조(visible construction)로 이어지는 일관된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 기능과 아이디어가 착용자에게 ‘읽히도록’ 만든다.

 

과거에는 셀럽의 증폭과 알고리즘 바이럴에 기대었다면 이제는 철학 주도형 규율로 전진한다. 하나의 ‘잇 피스’가 아니라 어휘(vocabulary)(반복되는 솔기와 패널, 하우스 비례, 유틸리티와 드라마를 화해시키는 시그니처 방식)에 커뮤니티(에디터, 바이어, 큐레이터, 충성 고객)가 모인다. 전시, 마이크로 드롭, 협업은 관객이 브랜드의 ‘문법’을 학습하도록 돕는 문화적 구두점이 된다. 중요한 점은 이 전환이 ‘반상업’이 아니라 오히려 더 상업적으로 유능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지만 경계 지어진다. 모듈러 설계는 불용 재고를 줄이고, 프리오더와 한정 생산은 피드백 루프를 단단히 묶으며, 명료한 내러티브는 리테일 현장에서의 설명 비용을 낮춘다. 결과적으로 공황성 세일은 줄고 재구매는 강화되며, LTV/CAC는 개선된다. 즉, 실험은 그 논리가 보이고 운영이 규율화될 때 ‘도박’이 아니라 자본이 축적되는 전략이 된다.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기사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살아 있는 아카이브가 쌓이고, 각 컬렉션은 세계와 나누는 길고도 이해 가능한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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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전한’ 시장에서 실험이 중요한가?

 

팬데믹 이후 재정비 국면에서 리테일러와 소비자는 리스크 회피형 제품, 즉 기대 판매가 검증된 베이식, 익숙한 실루엣, 안정적인 컬러로 기울었다. 공급망의 불안과 자본 비용 상승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부작용은 동질화다. 어디서나 같은 니트 폴로, 트렌치, 스니커즈가 걸리면 차별화는 무너지고 마진은 압박받으며, 브랜드는 관점이 아니라 프로모션 캘린더로 경쟁하게 된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이미 익숙한 형태를 보상하며 디자이너를 점진주의로 몰아넣는다. 이렇게 폭이 좁아지는 구도에서 한국의 몇몇 레이블은 반대의 태도를 택했다. 실험을 퍼포먼스가 아니라 상업적 헤지로 활용하는 것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제품이 더 싼 유사품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면 브랜드는 늘 가격을 두고 협상하게 된다. 반대로 제공물이 시스템, 즉 옷이 작동하고 느껴지며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협상의 대상은 가치가 된다. 규율화된 실험은 곧 탈상품화 전략이 된다.

 

 

 

실험이 팔리는 이유(잘 실행될 때):

 

- 멀티 기능성

컨버터블, 도킹, 사이즈 조절 등 변형 가능한 의복은 작은 주거, 기내용 여행, 변덕스러운 기후, 하이브리드 워크 등 실제 일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자전거 탑승을 위한 환기와 재구성이 가능한 재킷, 오피스와 애프터 아워를 전환하는 스커트 패널, 여러 셸에 도킹되는 라이너와 같은 기능은 한 벌당 사용 시나리오를 늘려 착용 단가를 낮추고, 과도한 하이프 없이도 프리미엄을 정당화한다. ‘시스템’을 익힌 고객은 라인 컬렉터로 전환되기 쉽다.

 

- 소재–테크 융합

인더스트리얼 트림, 보온과 반사 필름, 엔지니어드 니트, 바이오 코팅, 업사이클 복합재 등은 기능이 읽힐 때 힘을 발휘한다. 성능을 개선하는 동시에 의도를 소통한다. 어깨 봉제가 왜 테이핑되었는지, 패널이 왜 반사되는지, 니트 존이 왜 다른지 소비자가 눈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스태프의 설명 부담이 줄고 온라인에서도 자가 설명이 가능해진다. 가시적인 엔지니어링은 내구성 신뢰로 이어져 수선과 순환 프로그램 참여를 높인다.

 

- 내러티브 디자인

의례, 장소, 기억, 장인 계보 등 맥락을 품은 피스는 착용자에게 들고 다닐 이야기를 준다. 지역 작업복에서 파생된 소매, 도시의 발견 질감으로 주조한 하드웨어, 지하철 환승이나 시장 동선을 지도화한 프린트는 장식이 아니라 읽히는 논문(테제)이다. 제품은 문화를 만들어내며, 서사는 채널(에디토리얼, 뮤지엄, 소셜)과 시간(시즌)을 횡단해 복제 불가능한 어휘를 구축한다.

 

물론 이런 베팅은 단기적인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새로운 패턴은 학습이 필요하고, 새로운 소재는 테스트가 필요하며, 새로운 이야기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이크로 드롭, 프리오더 파일럿, 캡슐 협업처럼 경계 지어진 실험으로 운영하면 고대비 포지셔닝, 강한 어언드 미디어, 그리고 무엇보다 속도가 아니라 ‘의미’에 투자하는 고객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재무(P&L) 관점에서도 이점은 분명하다. 선명한 서사는 설명 비용을 낮추고, 모듈러 시스템은 불용 재고를 줄이며, 한정 생산은 피드백 루프를 강화한다. 커뮤니티(설문, 피팅, 아카이브 세일) 참여는 수요 예측의 정확도를 끌어올린다. 성공 지표는 기존의 셀인(sell-in)에서 정가 판매율(첫 가격 판매), 재구매율, 수선 참여, 중고가 유지, 상품 페이지 체류 시간으로 이동한다. 이는 계절성 ‘열기’가 아니라 문화적 내구성의 신호다. 시장은 리스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을 싫어한다. 읽히는 실험, 즉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이고 왜 중요한지 느껴지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실험은 리스크를 인식으로, 인식을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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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ti Uomo 2025의 PAF: 실험의 힘을 증명하다

 

서울 기반 남성복 레이블 PAF(Archive Faction)은 이 실험적 흐름을 선도하는 한국 브랜드 중 하나다. 전통적인 시즌 프레임을 거부하고 의복을 ‘웨어러블 오브젝트’로 접근한다. 인더스트리얼 디테일링, 변형 가능한 구조, 해체주의 패턴을 결합해 기능성과 강렬한 심미성을 동시에 구현한다. 이러한 컨셉 주도형 접근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남성복 행사 중 하나인 Pitti Uomo 2025 공식 초청으로 이어졌다. PAF에게 이 기회는 단순한 글로벌 데뷔가 아니라, 일관된 실험이 비전과 실행으로 뒷받침될 때 상업적 성과와 인정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가시적 사례가 되었다.

 

 

 

디자인과 시장 사이의 다리를 놓다

 

실험적 디자인이 성공하려면, 독창성이 소비자 이해와 연결되는 전략으로 지지되어야 한다.

 

- 마켓 터치포인트: 전시, 협업, 리미티드 에디션은 제품을 거래의 대상이 아닌 문화적 경험으로 위치시킨다.

- 스토리텔링: 명료한 시각·서사 언어는 소비자가 브랜드의 문화적·개념적 뿌리와 연결되도록 돕는다.

 

이 다리를 의도적으로 구축할 때 디자이너는 시장을 ‘따르는’ 데서 벗어나 시장 기대를 재설정한다. 가치의 정의를 바꾸고, 한 시즌이나 한 컬렉션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트렌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한국 패션 디자인의 다음 장

 

PAF가 pushBUTTON, Andersson Bell과 같은 혁신자들과 함께 그려낸 궤적은 더 큰 전환점을 시사한다. 실험은 모험이 아니라 브랜드가 자기만의 디자인 언어를 쓰고 시험하며 지속적으로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앞으로의 길은 ‘속도’가 아니라 ‘입장’을 세우는 데 달려 있다. 즉, 빠른 트렌드 차익을 노리는 전략에서 벗어나 철학, 스토리텔링, 체계적인 시도를 기반으로 한 슬로 디자인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더 적지만 더 명확한 선언, 사용과 재사용을 유도하는 모듈형 시스템, 오래 쓰이고 수선 가능한 소재의 선택, 그리고 시즌, 플랫폼, 지역을 넘어 희석되지 않고 전파될 수 있는 서사를 의미한다.

 

또한 성공의 척도를 단순한 선판매나 시즌별 화제성에서 벗어나 최초 가격 판매율(first-price sell-through), 반복 구매율, 중고 시장에서의 유지력, 그리고 실제로 고객이 참고하는 살아 있는 아카이브의 성장을 향하도록 재정립해야 한다. 한국 브랜드들의 전략적 과제는 스튜디오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낭비 없이 소량 생산을 반복할 수 있는 공장을 육성하고, 관객이 의류를 읽는 법을 가르치는 편집 및 박물관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협업을 단순한 로고 쌓기가 아니라 상호 학습의 구조로 만드는 것까지 생태계 전반에 걸쳐 있다. 이 전환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창작의 진정성을 지키고 경제적 회복력을 강화하며, 한국 브랜드들은 단일 시즌을 넘어 앞으로의 10년 동안 세계 복식 언어를 형성하는 장기적 문화 기여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 Founder: Doyoung Kim
  • Business Registration Number: 454-86-0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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