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제품의 수명과 가치를 설계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
디자인을 보는 눈을 높이는 과정은 형태 뒤에 숨어 있는 공학적, 기능적 논리를 읽어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오늘날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시선은 이제 단순한 형태 분석을 넘어선다. 제품을 둘러싼 전체 생애 주기(Life Cycle)까지 확장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거 산업디자인이 만들고 파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 디자인은 제품이 버려진 이후에도 의미 있는 순환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제품의 외형과 기능을 좌우하는 선택적 가치가 아니라 법적·공학적 설계의 의무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 Credit : Repair.eu, 'Making Batteries Removable and Replaceable...' >
EU의 배터리 규정처럼 배터리 교체 가능성을 강제하는 새로운 법적 기준은 디자인의 본질적 역할을 다시 정의한다. 이는 단순한 시장 트렌드를 넘어서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폐기를 최소화하는 설계가 필수 기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디자이너에게 환경적 책임이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창의성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자인이 과정이자 사고의 기록이라면 그 기록 속에는 이제 반드시 환경적 의무가 새롭게 포함된다. 지속가능성은 미래 산업디자인의 전략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다.
제품 수명 연장을 위한 디자인 전략

< Credit : Logitech, 제품 수명주기를 늘리고 수리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고려된 배터리 교체형 로지텍 Lift >
오랫동안 산업디자인은 제품이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시점에 가치를 극대화하고 이후 폐기되는 선형 모델에 머물러 왔다. 하지만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는 디자이너에게 제품의 끝을 다시 시작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설계 방식을 요구한다. 디자이너는 ‘예쁘다’는 감탄을 넘어 제품의 생애 주기 전체에 책임 있는 논리를 부여해야 한다. 이 순환 모델은 산업디자인에 네 가지 핵심적 목표를 강제하며 이는 제품의 형태, 구조, 소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 수리 용이성(Repairability) 극대화 : EU의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는 디자이너에게 제품을 쉽게 분해하고 핵심 부품을 교체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도록 명령한다. 나사 결합 확대, 고정 접착제 최소화, 모듈화된 부품 구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설계 기준이다. 이는 제품을 단순히 소비재가 아닌 장기적인 자산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이다.
• 사용 수명 연장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치가 더해지는 소재는 사용자의 정서적 결속을 강화하여 제품 수명을 자연스럽게 늘린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형태, 즉 영속적 디자인(Timeless Design)을 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시각적 안정성과 지속적 만족감을 제공해 불필요한 소비를 늦추는 강력한 전략이다.
• 분해 및 회수 용이성 : 제품이 폐기 단계에 도달했을 때 재료를 빠르고 정확하게 분리할 수 있도록 형태와 결합 방식을 설계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금속, 플라스틱 등 소재별로 분리를 효율화하고 단일 소재 사용을 극대화하는 것은 재활용 공정의 효율을 고려한 폐기 예측 설계다. 디자이너는 제품의 재료 구성표를 직접 설계하며, 복합 소재를 최소화하고 재료 순도를 높여 재활용 소재가 다시 고품질 제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순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공학적 결정 중 하나이다.
형태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힘
소재는 단순히 색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선택지를 넘어, 제품의 환경적 책임과 미래의 재생산 가능성을 결정하는 근본적 요소가 된다. 형태가 여러 요소의 충돌과 조율 끝에 도출된 결과물이라면 소재는 그 과정 전체를 이끄는 출발점이다. 뛰어난 디자이너는 이제 소재 과학자(Material Scientist)의 사고 방식에 가까워져야 한다. 제품의 모든 소재는 아래 질문에 명확하게 답해야 한다.

< Credit : Model-Solution, CMF랩 >
1. 재생 가능성
석유 기반 플라스틱 대신 바이오 기반 소재, 재활용 알루미늄, 해양 폐기물 재활용 소재 등을 선택하는 일은 형태의 제약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속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찾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환경적 한계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이야말로 현대 디자인의 본질이다.
2. 독성 및 오염 관리
제조와 폐기 과정에서 유해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소재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매력적인 소재를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제품의 전체 공정에 걸친 환경 영향을 계산하는 일이다. 환경적 책임은 미적 판단을 넘어선 필수적 설계 제약이다.
3. 공급망 투명성
소재가 어디에서 채취되고, 어떤 윤리적 기준을 통과했으며, 누가 가공했는지 까지 추적하는 투명성은 프리미엄 디자인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이 공급망을 시각화하고 관리하는 능력은 디자이너의 확장된 역할이며, 윤리적 채취를 보증하는 소재 선택은 브랜드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형태 제작자를 넘어 순환 설계자로

< Credit : European Parliament Research Service, Circular Economy Concept Diagram >
디자이너는 이제 순환 관리 설계자(Circular Management Designer)로 진화해야 한다. 제품 디자인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제품의 시작부터 폐기 이후의 재사용까지 전 생애 주기를 설계하고 책임지는 일이다. EU의 새로운 규제들은 디자이너에게 도전이지만 동시에 지속가능한 디자인이 경쟁력 있는 디자인이 되는 강력한 시장 논리를 제공한다. 형태 속의 논리를 읽어내는 디자이너만이 이 환경적 제약을 창의성으로 전환하여 미학적 아름다움과 지속가능한 가치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다. ‘예쁘다’는 감탄에서 ‘왜’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는 순간 디자인은 이미지가 아닌 언어가 되며 소재에 지속가능성이라는 논리를 부여하는 순간 디자인은 단순한 상품을 넘어 사회적 약속이 된다. 디자이너의 시선은 이제 제품이 사용되는 현재뿐 아니라 분해되고 재탄생하는 미래의 시간까지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미래 산업디자인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우리가 만든 형태가 다음 세대에 책임 있는 유산으로 남도록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형태를 읽는다는 것은 곧 인간과 지구의 미래를 읽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