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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얼마 전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리뷰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완성도가 높았고 아이디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작품마다 주제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결이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학생들이 비핸스(Behance)나 핀터레스트(Pinterest) 같은 플랫폼을 참고하면서 서로의 시각 언어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무에서 창조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다듬고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 더 나은 형태로 발전시키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학생들이 선배나 동료, 혹은 온라인에 공개된 디자인을 모방하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AI가 창작의 한 축으로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지금,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생성형 AI는 디자이너가 생각하기도 전에 수천, 수만 가지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거대한 참고 자료처럼 기능한다. 이로 인해 ‘AI가 모든 아이디어를 대신 내줄 수 있다면 디자이너 고유의 감각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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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scom AI : 텍스트 프롬프트로 구현한 스케치 >

 

 

 

한 신입생이 “생성형 AI로 고퀄리티 스케치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면, 굳이 스케치 연습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연습 방식에 대한 고민을 넘어, 디자인 교육의 본질을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산업디자인 교육에서 스케치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생각을 탐구하고 손을 통해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다. 그러나 AI가 이 과정을 빠르게 대체하게 되면 디자이너는 숙고의 시간을 건너뛰고 곧바로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고민을 통해 쌓이는 디자이너의 내적 자산은 점점 사라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AI에게 최적의 답을 빠르게 제공받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의 진정한 가치는 빠른 정답 찾기가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다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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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MIT 미디어랩에서 진행된 한 연구도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연구진은 대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작성하게 하면서 아무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 그룹, 검색엔진을 활용하는 그룹,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그룹으로 나눴다. 그 결과, ChatGPT를 활용한 그룹의 뇌 활동이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결과물은 더 빠르고 쉽게 만들어졌지만 사고에 필요한 연결성과 기억,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소유감은 줄어들었다. 이 연구는 AI가 감각 자체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사고하고 고민하는 기회를 줄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내적 자산이며 이는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셰프는 단순히 레시피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재료의 신선도를 손끝으로 확인하고 불의 세기를 미묘하게 조절하며 맛의 깊이를 완성해낸다. 마찬가지로 탁월한 디자이너는 데이터 너머의 감각적 판단을 가지고 있다. 소재의 질감, 무게, 빛의 반사 등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로는 대체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AI는 너무나도 손쉽게 정제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 과정에서 종이에 연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거나, 클레이를 직접 만지며 재료를 다루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결국 감각적 직관의 퇴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디자이너가 잃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깊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학생들은 점점 손으로 만드는 경험을 꺼려하고 과거의 디자인 방식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 흐름은 디자인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AI 시대에는 이런 경향이 더 가속화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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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djourney로 생성한 디자인 시안 >

 

 

 

그렇다고 해서 AI가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방해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AI는 감각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생성형 AI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왜 그것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고 어떻게 다듬어 구현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는 감각을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의 중요성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AI가 제시하는 다양한 시안을 보면서 디자이너는 스스로에게 더 치열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왜 이 선택이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한가’, ‘이 안에 인간적인 따뜻함은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등. 이 질문들은 단순히 결과를 고르는 것을 넘어 디자이너의 감각을 단련시키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AI를 도구로만 대하지 않고 협업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 AI가 수천 개의 디자인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왜 이 디자인인가’를 묻고 분석하며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세우는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모든 것을 AI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때로는 손으로 직접 스케치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소재를 만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차이, 즉 손맛은 AI가 제공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다. AI는 디자이너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결국 디자이너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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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Tool., Inc on Unsplash >

 

 

 

오늘날 디자인 프로세스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도구와 기술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본질적인 감각이다.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지휘자이자 큐레이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다. 앞으로의 디자이너는 AI가 제시하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나침반을 가지고 항해할 줄 알아야 한다. 기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감각의 본질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야말로 미래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적 리더다. 이 나침반은 화려한 도구나 최신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감각과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다.

 

종이에 연필을 댈 때 피어나는 창의성, 재료를 손끝으로 느끼며 발견하는 미묘한 차이, 동료와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울림은 디자이너를 성장하게 만든다. AI가 제시하는 수많은 정답 중에서 ‘진짜’를 고를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AI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감각을 잃지 않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AI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디자이너의 정체성이며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창의적 리더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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