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형 | 인덕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생활 속 시각디자인 저자,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매일 아침 출근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하철을 탄다. 좁은 공간에 몸을 밀어 넣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을 참아낸다. 하지만 같은 지하철이라도 어떤 나라는 조금 더 배려하고, 어떤 나라는 조금 덜 배려한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배려 디자인'이다.
일본 나고야, 여성전용칸이라는 선택
일본 나고야시 교통국(나고야 지하철)은 2000년대 초부터 여성전용칸을 운영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인 오전 7~9시 사이에 특정 칸을 여성 전용으로 지정하여 성추행으로부터 여성 승객을 보호한다. 일본에서 여성전용칸은 1912년 최초로 도입되었고, 2000년부터 대대적으로 확산되었다. 나고야를 포함한 도쿄, 오사카 등 일본 주요 도시에서 여성전용칸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승강장 바닥에는 분홍색 표시가 있고, 플랫폼 스크린 도어에는 ‘Women Only’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일본 사회에서 여성전용칸은 필수적인 안전 조치로 인식되고 있으며,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 잡았다. 디자인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여성전용칸은 단순히 칸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선다. 승강장 바닥의 분홍색 대기 라인, 전용칸 위치를 알리는 명확한 사인 시스템, 열차 외부와 내부의 일관된 표시.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시각적으로 명확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것이 바로 배려 디자인의 완성도다.

타이베이 지하철, 질서를 만드는 승차 라인
대만 타이베이 지하철(MRT)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승차 라인이다. 승강장 바닥에 그려진 라인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질서를 만드는 디자인이다. 하차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과 승차하는 사람을 위한 라인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타이베이 지하철 승강장을 보면 화살표로 표시된 대기 라인이 정확히 열차 문이 열리는 위치에 맞춰져 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열차가 도착하면 먼저 하차하는 사람들을 위해 양쪽으로 비켜선다. 그리고 차례대로 질서 있게 탑승한다. 이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디자인이 그렇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승차 라인의 디자인은 간단하지만 효과적이다. 시각적으로 명확한 색상 대비, 직관적인 화살표, 적절한 간격.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타이베이 지하철은 깨끗하고 조용하며 질서 정연하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잘 디자인된 승차 시스템에 있다.
한국, 여성전용칸 도입의 실패
한국에서도 여성전용칸 도입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92년 수도권 전철 1호선에 여성·노약자 전용칸을 도입했지만, 홍보 부족과 출근시간 혼잡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전용칸 승객의 40%가 남자였고, 10여 년간 표지판만 붙어 있다가 흐지부지 폐지되었다. 2007년과 2011년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가, 2013년 대구도시철도가 여성전용칸을 도입하려 했지만 모두 반대 여론으로 무산되었다. 2016년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은 ‘여성 배려칸’이라는 이름으로 출퇴근 시간(오전 7~9시, 오후 6~8시)에 시범 운영했지만, 2017년 이후 사실상 폐지되었다.
반대 여론의 핵심은 ‘역차별’이었다.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여성전용칸이 아닌 일반칸에 타는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 “보호를 명분으로 여성을 특정 공간에 격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조차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부산 여성배려칸의 경우 공식 명칭은 ‘배려칸’이었지만 영문 표기는 ‘Women Only’였다. 명칭부터 혼란스러웠고, 실효성도 없었다. 2017년 7월 기준으로 남성 승객이 많이 타고 있었고,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다. 표지판만 붙여놓은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했다.
왜 한국은 실패하고 일본은 성공했나
같은 여성전용칸이지만 일본에서는 20년 넘게 유지되고 한국에서는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인의 차이다. 일본은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디자인했다. 승강장 바닥의 분홍색 대기 라인, 명확한 위치 표시, 일관된 사인 시스템, 엄격한 시행.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를 먼저 만들고, 그 합의를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여성전용칸은 “성추행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안전 조치”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디자인이 뒷받침되었다. 한국은 급하게 도입하고 형식적으로 운영했다. 표지판만 붙여놓고, 홍보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제재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 없이 밀어붙였다.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과 ‘남녀평등’이라는 가치 사이에서 충분한 논의 없이 제도만 도입했다. 디자인은 그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 부산 여성배려칸의 경우, 명칭부터 혼란스러웠다. ‘배려칸’인지 ‘전용칸’인지 명확하지 않았고, 영문 표기와 한글 명칭이 달랐다. 이는 정책 입안자들조차 이 제도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명확하지 않은 정책은 명확하지 않은 디자인을 낳고, 명확하지 않은 디자인은 실패한다.
배려 디자인의 핵심은 명확함이다
지하철 배려 디자인의 핵심은 명확함이다. 무엇을 배려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타이베이 지하철의 승차 라인은 명확하다. “여기 서서 기다리세요”, “하차하는 사람을 위해 이 공간을 비워두세요”, “차례대로 타세요”.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다. 바닥의 선과 화살표만 봐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여성전용칸도 명확하다. 분홍색 라인, ‘Women Only’ 표시, 특정 시간대 운영.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제도에 대한 찬반 논란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다. 한국 지하철은 명확하지 않다. 부산 여성배려칸은 ‘배려’인지 ‘전용’인지도 불분명했다. 서울 지하철의 노약자석은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임산부 배려석도 마찬가지다. 표시는 있지만, 실효성은 없다. 디자인은 있지만 배려는 없다.

< 이미지 출처 : 서울특별시 >
서울 지하철 노선도, 40년 만의 변화
2025년 서울시는 40년 만에 지하철 노선도 디자인을 전면 개편했다. 시각약자, 외국인을 배려한 읽기 쉬운 디자인으로, 8선형 적용, 신호등 방식의 환승역 표기, 지리 정보 표기, 구분이 쉬운 색상과 패턴을 적용했다. 아이트래킹 실험 결과, 역 찾기 소요 시간은 최대 55%, 환승역 길 찾기 소요 시간은 최대 69% 단축되었다. 특히 외국인의 길 찾기 소요 시간 감소 폭이 내국인보다 21.5% 더 높게 나타났다. 이것이 배려 디자인의 효과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노선도는 바뀌었지만, 승강장의 혼잡함은 그대로다. 질서 있는 승하차를 유도하는 디자인은 여전히 미흡하다. 타이베이처럼 명확한 승차 라인도 없고, 일본처럼 체계적인 대기 시스템도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문 앞에 몰려들고, 하차하는 사람과 승차하는 사람이 뒤엉킨다.
배려는 디자인에서 시작된다
지하철은 공공재다. 모두가 사용하고, 모두가 불편을 감수하며, 모두가 배려를 필요로 한다. 그 배려를 실현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여성전용칸 논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여성전용칸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그것을 효과적인 디자인으로 구현할 것인가”다. 일본은 20년 넘게 여성전용칸을 운영하며 그 답을 찾았다. 한국은 30년 넘게 시도하고 실패하며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타이베이의 승차 라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선을 그으면 질서가 생긴다”가 아니라 “명확한 디자인이 명확한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바닥에 선 하나 긋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선이 의미를 갖고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려면,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 개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디자인이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이다. 55%, 69%의 시간 단축.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매일 수백만 명이 사용하는 지하철에서 1분, 2분의 시간 절약은 엄청난 가치다. 하나의 사람들이 덜 헤매고, 덜 스트레스 받으며, 조금 더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좋은 디자인은 가장 약한 사람을 배려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블록,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엘리베이터, 임산부를 위한 배려석. 이 모든 것이 배려 디자인이다. 여성전용칸도 마찬가지다. 성추행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배려다. 일본 사회는 이를 인정했고, 한국 사회는 거부했다. 그 차이가 20년 넘게 유지되는 제도와 몇 년 만에 폐지되는 제도의 차이를 만들었다.
승차 라인도 마찬가지다.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노약자, 짐이 많은 사람, 처음 지하철을 타는 외국인. 이들을 위한 배려가 모두를 위한 질서를 만든다. 지하철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좁은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부딪히고, 배려하거나 배려받지 못한다. 그 공간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다. 타이베이 지하철처럼 명확한 승차 라인을, 일본 지하철처럼 체계적인 안전 시스템을, 서울 지하철처럼 읽기 쉬운 노선도를. 이 모든 것이 합쳐질 때, 비로소 우리는 ‘배려하는 지하철’을 만들 수 있다. 지하철에는 배려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