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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관 | 울산대학교 교수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2025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 한 해를 돌아보며 다음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무엇을 만들었고, 무엇을 배웠는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배움은 과거를 통해 오늘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존 듀이가 강조했듯 경험은 그 자체보다 그것을 되돌아보는 태도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 성찰은 건축과 디자인을 둘러싼 오늘의 환경, 특히 AI가 창작의 전면에 등장한 지금 더욱 중요해졌다. AI는 이제 이미지와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놀라운 속도와 양을 보여준다. 몇 줄의 프롬프트만으로 특정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결과물이 무한히 생산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이것은 창의적인 참조(reference)인가, 아니면 정교해진 복제(copy)인가.

 

디자인 분야에서 카피는 오랫동안 명확한 금기였다. 독창성은 디자인의 생명이며, 형태나 이미지를 그대로 베끼는 순간 그 작업은 설득력을 잃는다. 반면 건축에서는 역사적 건축이나 도시 맥락을 참조하고 재해석하는 전통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건축은 단일한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 속에서 축적되며 변화해 온 문화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필자가 디자인과 건축을 모두 전공하며 가장 크게 체감한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건축에서 레퍼런스를 처음 배울 때는 쉽지 않았다. 다른 건축가의 작품을 참고하는 일이 마치 ‘카피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디까지가 배움이고 어디부터가 모방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공부가 깊어질수록 레퍼런스에 대한 이해는 점차 달라졌다. 레퍼런스란 형태를 가져오는 행위가 아니라, 그 건축이 만들어진 배경—역사와 문화, 기술과 산업, 사회적 질문—을 읽어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대로 된 레퍼런스를 공부하지 않으면, 가장 쉽게 형태만 베끼는 카피로 빠진다는 점도 그때 깨달았다. 이 차이는 디자인과 건축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애플은 독일 브라운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대신 핵심 철학을 참조하고, 사용자 경험과 기술, 시대적 감각을 결합해 전혀 다른 디자인 언어로 발전시켰다. 반대로 외형만 흉내 낸 수많은 모방 제품들은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같은 출발점이라도 사고 방식을 참조했는지, 결과만 복제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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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비즈니스 인사이더 >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하 하디드의 건축을 무단으로 복제한 사례가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레퍼런스가 아닌 노골적인 카피였기 때문이다. 곡선과 실루엣은 닮았을지 몰라도, 도시와 구조,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설계 사고는 빠져 있었다. 반면 안도 다다오는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적 공간 감각과 빛, 침묵의 태도를 통해 전혀 다른 건축 언어를 구축했다. 이는 레퍼런스가 어떻게 창의적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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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코르뷔제 이미지 출처 : 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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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더재팬 타임스 >

 

 

 

AI가 만드는 이미지들은 이러한 경계를 더욱 흐리게 만든다. AI는 과거의 방대한 결과물을 학습해 그럴듯한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형태가 왜 등장했는지, 어떤 고민과 실패를 거쳐 왔는지는 건너뛴다. 디자인과 건축을 모두 경험해 온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가장 중요한 학습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반복하는 위험한 방식이다. 그렇다고 AI를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AI는 분명 창의성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다. 다만 그것을 ‘결과를 대신 만들어주는 기계’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질문과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보조 도구로 사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선택의 기준이 바로 카피와 레퍼런스를 구분하는 태도다.

 

결국 디자인과 건축에서 지켜야 할 것은 분명하다. 레퍼런스란 형태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우리는 카피를 피할 수 있다. 필자가 디자인과 건축을 모두 전공한 경험은, 이 두 영역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연결하는 지점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레퍼런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두 분야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AI 시대일수록 아시아의 건축과 디자인은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 아시아는 오랜 시간 축적된 장소성, 재료 감각, 산업과 기술, 생활 문화의 층위를 지닌 지역이다. 이러한 맥락을 읽어내지 못한 채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쉽게 소비되고 빠르게 사라진다. 반대로, 아시아만의 경험과 기억을 책임 있게 참조하고 재해석할 때, 우리의 건축과 디자인은 세계 속에서 분명한 언어를 갖게 된다.

 

2025년이 남긴 수많은 이미지와 논쟁 속에서,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무한 반복되는 카피의 편리함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레퍼런스를 통해 더 깊은 사고로 나아갈 것인가. 다가올 2026년은 기술 위에 인간의 해석과 판단, 그리고 아시아적 창의성이 더욱 또렷이 드러나는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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