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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우 | 써니아일랜드 대표

디자인 스튜디오 창업노트 저자K-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

 

 

 

우리는 평소에 비상구를 거의 보지 않는다. 존재는 알고 있지만, 인식하지 않는다. 영화 <엑시트> 속 주인공은 도시를 뒤덮은 유독가스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움직인다.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 어떤 경로가 연결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 장면을 보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저 상황에서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평소에 비상 상황을 전제로 공간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편의에 맞춰져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스마트폰을 보고, 건물에 들어가면서도 비상구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드물다. 공간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보다 ‘편하게 이용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상구는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인식 밖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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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조적으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위협이 감지되는 순간 도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사람들은 시스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극단적인 설정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재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순간적인 판단력이 아니라, 그 이전에 구축된 ‘준비 상태’라는 점이다. 결국 위기 상황에서의 차이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준비된 환경과 준비된 인식에서 발생한다. 준비된 사람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같은 시간 속에서 더 많은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이 차이는 재난이 발생한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의 일상에서 이미 결정된다.

 

우리가 비상구에 무관심한 이유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인지 구조는 효율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정보, 즉각적인 필요가 없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비상구는 ‘알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정보’이기 때문에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 구조가 비상 상황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야는 좁아지고, 선택지는 줄어들며, 익숙한 경로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상구 대신 들어왔던 출입구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다. 그러나 공공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 ‘자연스러운 선택’이 위험이 되는 순간을 줄이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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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재난 대응 디자인을 비상구, 유도등, 안내 방송과 같은 ‘비상시에 작동하는 장치’로 이해한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의 관점에서 재난 대응은 그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일상에서 이미 설계되어야 한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더 똑똑해지지 않는다. 불안과 긴장, 군중 심리 속에서 오히려 더 단순하고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이때 사람을 살리는 것은 복잡한 정보가 아니라, 이미 익숙해진 구조와 즉각적으로 해석 가능한 환경이다. 따라서 비상 상황을 위한 공공디자인은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접근해야 한다. 첫째는 평상시 단계다. 이때의 역할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시키는 것’이다. 반복적인 노출과 일관된 시각 체계를 통해, 시민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안전 정보를 축적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엘리베이터, 복도, 출입구 등 다양한 접점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보는 지식이 아니라 감각으로 전환된다. 이는 일종의 사전 학습이자, 행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비상시 단계다. 이때 공공디자인은 ‘읽는 정보’가 아니라 ‘따라가는 구조’로 작동해야 한다. 재난 상황에서는 긴 설명이나 복잡한 안내가 기능하지 않는다. 대신 바닥 유도선, 고대비 색채, 반복되는 화살표와 같은 직관적인 시각 요소를 통해, 사람들이 생각하기 전에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선택지를 줄이고, 하나의 명확한 방향으로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다. 동시에 군중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병목을 최소화하고, 이동이 끊기지 않는 연속적인 경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시각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 시스템’이다. 사람의 본능적 반응과 공간의 구조를 연결하여, 혼란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안전한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설계다.

 

결국 비상 상황 대응은 개인의 책임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공공기관의 제도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것이 공공디자인의 역할이다. 제도의 언어를 시민의 언어로 번역하고, 매뉴얼을 경험 가능한 구조로 변환하며, 행정적 지침을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공공디자인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이다. 우리는 비상구를 외면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인식하도록 설계된 환경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온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자연스러운 인식과 행동을 바꾸지 않고, 그 흐름 안에서 안전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공공디자인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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