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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박사 | 벨류포머 대표

 

 

 


 

 

 

1980년 일본은 경제적으로 한창 호황이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상품들이 시장을 채우고 있던 그때 무인양품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했다. 브랜드 이름 자체가 '상표가 없는 좋은 제품'이라는 뜻이었고 출발점은 일본 대형 슈퍼마켓 세이유의 자체 브랜드였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제품 본연의 기능에 집중하며 과대포장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이었다. 지금이야 이 방향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모든 것이 화려함을 경쟁하던 시대에 이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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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무지 >

 

 

 

그로부터 45년이 지났다. 무인양품은 지금 전 세계 1,000개 이상의 매장에서 7,000가지 이상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의류와 문구에서 시작하여 가구와 식품과 화장품은 물론 조립식 주택과 호텔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런데 이 45년간의 확장 과정에서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무인양품이 하는 말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これでいい)'. 1980년에도 그랬고 2025년에도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통 45년이면 브랜드의 방향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다. 시장이 변하고 리더가 바뀌고 소비자의 취향이 달라지면 메시지도 함께 변한다. 그런데 무인양품은 같은 철학을 45년간 반복하면서 그 반복 자체를 전략으로 삼았다. 디자인 전략의 관점에서 이것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축적은 어떻게 전략이 되는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 하라 켄야는 무인양품의 디자인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최대한 단순한 디자인으로 다양한 생활환경에서 어울리며 어떤 수준의 삶이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간결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단순함을 유지하라'는 원칙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 안에서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매출이 정체되면 "좀 더 눈에 띄는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유혹이 생긴다. 경쟁사가 화려한 컬래버레이션을 내놓으면 "우리도 비슷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이 따라온다. 실제로 무인양품도 2000년대 중반 한 차례 심각한 위기를 겪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성장을 위해 브랜드의 본래 원칙에서 벗어난 상품들을 무리하게 확대한 것이었다. 같은 말을 45년간 반복한다는 것은 45년간 그 말에서 벗어나라는 유혹을 거부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기 이후 무인양품이 한 일은 흥미롭다. 새로운 방향을 찾은 것이 아니라 원래의 방향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했다. '무지그램(MUJIGRAM)'이라 불리는 매뉴얼이 대표적인데 인사법부터 물건을 건네는 방법과 잔돈을 주고받는 방법 그리고 상품 진열법까지 매장 운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매장을 가더라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외부 디자이너로 구성된 고문 위원단을 두어 상품이 브랜드 철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검증하는 체계도 갖추었다. 다시 말해 무인양품은 '같은 말을 반복하겠다'는 의지만으로 버틴 것이 아니다.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를 만들었기에 45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학이 축적되려면 철학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철학을 지켜내는 구조가 함께 축적되어야 한다.

 

 

 

축적이 만들어내는 것

 

축적의 힘은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인양품 매장에 들어간 사람이 느끼는 것은 "여기는 뭔가 편안하다"는 막연한 감각이지 "이 브랜드가 45년간 같은 철학을 축적해왔구나"라는 분석적 인식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막연한 편안함'이야말로 축적의 결과물이다. 무인양품의 모든 상품은 색상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최소한의 포장으로 진열되며 기능적인 정보와 가격표만 표시된다. 이것이 한두 개 상품이라면 '단순한 디자인'에 불과하겠지만 7,000개 이상의 상품이 같은 원칙으로 만들어져 하나의 매장 안에 모여 있을 때 그것은 개별 상품의 디자인을 넘어서 하나의 세계관이 된다. 소비자는 개별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 안에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하여 상품에 매장에 서비스에 녹여낸 결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는 무인양품의 역설은 축적 없이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 한 번의 선언으로는 세계관이 만들어지지 않으며 오랜 시간에 걸친 일관된 실천의 누적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관심의 축적이 설계의 토대가 될 때

 

축적이 전략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꺼내보고 싶다. 필자는 얼마전에 뜬금없이 한방차 사업을 한 적이 있다. 뜬금 없다는 것은 시스템과 플랫폼을 한창 설계하고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한방차를 만들었다고 하니 의아해 보였다는 것이다. 한방차 레시피를 직접 개발하고 한약재 소싱처를 찾아다니며 패키지, 브랜딩과 유통 전략을 리드했는데 일주일 중 잠깐의 짬을 낸 일탈로 시작했지만 필자에게 행복한 도파민을 주는 경험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업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오랫동안 취미처럼 때로는 그때그때의 관심사로 축적해왔던 한약재와 한방에 대한 아주 오랜 공부가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저 흥미로워서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이 어느 시점에서 사업의 토대가 된 것이다. 레시피를 구성할 때 약재 간의 궁합과 비율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소싱처를 찾을 때 품질을 판별하는 눈이 있었으며 패키지를 설계할 때 소비자가 한방차라는 카테고리에서 어떤 기대와 불안을 느끼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규모는 무인양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축적된 경험과 관심이 없었다면 사업의 구조를 설계하는 출발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레시피는 한약재 지식의 축적에서 나왔고 좋은 소싱 구조는 품질을 판별하는 경험의 축적에서 나왔으며 소비자의 심리를 반영한 패키지는 시스템 설계를 하면서 공감적 시각으로 사용자를 이해하려는 관심의 축적에서 나왔다. 어느 것도 사업을 시작한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축적 없는 전략, 전략 없는 축적

 

이 시리즈를 통해 디자인 전략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다. 관점을 바꾸는 일과 구조를 설계하는 일 그리고 제약을 설계 원칙으로 삼는 일. 이번에 무인양품을 통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의 토대에 축적이 있다는 점이다. 디자인 전략에서 가장 과소평가되는 요소가 시간이다. 좋은 아이디어나 날카로운 관점이나 영리한 구조 같은 것들이 주목받기 쉽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짜 힘을 발휘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축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인양품이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한 번 말했을 때는 슬로건이었지만 45년간 반복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반대로 축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방향 없이 쌓기만 한 경험은 정리되지 않은 창고와 같아서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쓸 수 없다. 축적이 전략이 되려면 쌓인 것들을 연결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 무인양품이 철학만으로 버틴 것이 아니라 무지그램이라는 구조를 만든 것처럼 축적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략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축적 없는 전략은 얕고 전략 없는 축적은 흩어진다. 디자인 전략의 깊이는 결국 얼마나 오래 얼마나 일관되게 그리고 얼마나 의미 있는 방향으로 쌓아왔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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