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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릭스 박용락 이사

<K-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 <고딕폰트디자인워크북> 저자

 

 

 


 

 

 

폰트를 만든다는 건 단지 글자의 외형을 그리는 작업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형을 매개로 언어를 설계하고, 시각을 통해 사고를 구조화하는 작업입니다. 서체는 단순한 디자인 요소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세계관과 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조형 언어이자, 시대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인프라입니다. 26년 전 저는 폰트 디자인이라는 낯설고도 방대한 세계에 발을 디뎠고,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껴졌던 것은, 서체야말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폰트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읽게 하는 일이기도 하며, 디자이너의 철학을 고정된 구조 안에 정제된 형태로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묻습니다. 이 글자의 구조는 타당한가? 이 자소의 비례는 시대의 리듬에 맞는가? 그리고 이 서체는, 디자이너가 선택할만한 ‘기준’이 되는가?

 

 

 

축적은 관점을 만든다

 

어떤 분야든 한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쌓인 시간만큼 분명한 시선이 생겨납니다. 저는 26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폰트 디자인에 쏟아왔고, 특히 한글 고딕이라는 구조에 천착해 왔습니다. 여러 프로젝트를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자소를 그리고 지웠고, 폰트라는 존재가 단순히 스타일의 축적이 아닌 구조와 논리, 시스템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점차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축적은 결국 관점으로 수렴되었고, 그 관점은 더 이상 개인적인 취향이 아닌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기준’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그동안의 경험과 이론을 《고딕 폰트 디자인 워크북》이라는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디자이너를 위한 안내서가 아니라, 한글 고딕이라는 장르를 구조적으로 탐색하고 재해석한 결과물이며, 저 자신에게도 작업의 기준을 끊임없이 되묻는 나침반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감각만으로는 좋은 서체를 만들 수 없다고 믿습니다. 디자인은 미학 이전에 구조이고, 조형 이전에 철학이며, 모든 시각적 표현은 논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폰트 디자인이야말로 그러한 원칙이 가장 정직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며, 그 구조의 밀도를 결정하는 건 디자이너의 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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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k고딕, ‘기준’이 되기 위한 고딕

 

Rak고딕은 단순한 고딕체가 아닙니다. 이 서체는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연구와 철학, 그리고 한글 고딕에 대한 구조적 탐구의 결과물입니다. 많은 디자이너가 작업을 시작할 때 기본서체를 찾습니다. 너무 개성적이지 않으면서도 조형이 깔끔하고, 어떤 콘텐츠와도 잘 어울리며, 정보 전달을 방해하지 않는 중립적인 서체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장에는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서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Rak고딕은 이러한 필요에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디자이너에게 진정한 기본서체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에 대한 저만의 해석을 실체화했습니다. Rak고딕은 가독성과 조형 균형, 명도 대비와 자소 간 간격, 구조의 안정성과 리듬의 조화를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물입니다. 이 서체는 디자이너가 불필요한 판단을 줄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용한 도구이자, 콘텐츠에 얹혀 그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정돈하는 역할을 합니다. 중립성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모든 조건에 대응할 수 있는 설계의 결과입니다. Rak고딕은 그 중립성을 설계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한글 고딕의 구조적 기준점을 새롭게 제시하려는 저의 해석입니다.

 

 

 

고딕의 구조를 삼등분하다

 

Rak고딕을 설계하며 하나의 서체가 모든 감각과 용도를 포괄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의 조형 언어 안에서 의미 있는 세 가지 구조로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중립적인 구조인 ‘Rak고딕’입니다. 안정성과 일관성, 읽기 쉬운 흐름을 설계의 중심에 둔 서체로, 브랜드 디자인, UI, 에디토리얼 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기본 서체입니다. 두 번째는 ‘Rak세운고딕’입니다. ‘ㅊ,ㅎ’ 획의 꼭지를 세워서 조형의 긴장감을 높여 시각적 리듬을 강조한 이 구조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필요로 하는 영상 타이틀, 하이엔드 브랜드, 패션 콘텐츠 등에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은 출시 예정인 ‘Rak정원고딕’으로, ‘ㅇ’을 정원형으로 설계해 부드럽고 정돈된 조형미를 추구합니다. 이 구조는 특히 감성적인 콘텐츠, 아동 및 교육 환경, 따뜻한 톤이 요구되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에서 시각적 일관성과 친화력을 제공합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디자인적 옵션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맥락과 목적에 대응하는 구조적 분화입니다. 고딕이라는 장르를 기능적으로 해석하고, 감성의 차이를 구조의 차이로 번역한 작업이 바로 이 세 가지 서체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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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언어의 확장과 정밀도

 

Rak고딕 패밀리는 각 구조마다 스타일 확장을 통해 또 다른 레이어의 조형 언어를 제안합니다. ‘Small’은 자소의 골격을 축소하여 공간 활용이 중요한 환경, 특히 모바일 UI나 마이크로디자인 단위에서 정돈된 시각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Big’은 자소의 내부 공간을 확장하여 제목, 간판, 패키지처럼 시각적 임팩트가 필요한 환경에서 넉넉하고 안정적인 인상을 부여합니다. ‘Rounded’는 획의 마감을 부드럽게 처리해 사용자 경험이 중요한 환경에서 친근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확장은 단지 분위기를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서체가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조형의 언어를 풍부하게 확장한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구조마다 10단계의 굵기가 정밀하게 세팅되어 있어, 디자이너는 조형 일관성을 해치지 않고도 무드와 기능에 따라 서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Rak고딕은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기능성과 감성을 동시에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정밀한 조형 시스템’입니다. 저는 디자이너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디렉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AKFONT는 그런 설계적 주권을 디자이너에게 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베리어블 폰트라는 도구

 

RAK-VF 시리즈는 RAKFONT의 철학을 기술로 확장한 결과물입니다. 이 베리어블 폰트는 단순히 굵기를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서, 서체의 구조 자체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가변형 시스템을 기반으로 합니다. Small에서 Big까지 자소의 골격이 변하며, 디자이너는 단 하나의 폰트 파일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드를 미세하게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해진 선택지를 제공하는 폰트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직접 자신의 서체를 조율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수만 가지의 조합이 구현될 수 있는 이 시스템은 디자인의 고정값을 해체하고, 디자이너의 통제 하에 서체가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의 다변화, 해상도의 차이, 반응형 인터페이스의 확대 등 현대의 타이포그래피 환경에서 RAK-VF는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서체가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철학에 따라 ‘움직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와 철학이 함께 설계된 시스템일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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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은 정답이 아니라 태도다

 

RAKFONT의 최종 목표는 한글 고딕의 헬베티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징적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헬베티카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서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단지 조형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구조가 시대의 요구를 안정적으로 품어내며 디자이너에게 신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Rak고딕이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그런 기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어떤 브랜드든, 어떤 매체든, 어떤 시대든 흔들리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기준. 저는 디자인은 곧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책임 있는 조형은 기준 위에 세워져야 하며, 그 기준은 타인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AKFONT는 제가 가진 디자인 철학과 기술, 이론, 감각의 총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디자이너의 언어로,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건네는 질문이자 제안입니다. 디자인은 견디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기준은 결국 시간 속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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