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디자인은 더 이상 '예쁘고 쓰기 좋은 것'을 만드는 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제품을 고를 때 기능과 가격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묻는다. 제품과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사람들은 제품에 대하여도 제품에 담겨진 철학, 제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즉, 우리는 제품 또는 서비스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여기서 CMF(Color, Material, Finish)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CMF는 브랜드 또는 제품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언어다. 손에 닿는 순간의 촉감, 빛에 비친 색의 깊이,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표면의 질감. 이 모든 것이 가치에 대한 약속을 말없이 전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발표한 2025-26 CMF 트렌드 리포트는 이런 변화를 명확히 보여준다. CMF가 단순한 마감이 아니라 “가치”를 전달하는 인터페이스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사람과 제품이 만나는 인터페이스(interface), 그 표면은 이제 침묵하지 않는다. 표면은 브랜드의 철학을 말한다.

< Lionel Jadot at Maison&Objet 2024 >
2024년 Maison&Object에서 벨기에 디자이너 Lionel Jadot이 선보인 디자인은 불완전함과 파격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어글리 디자인”의 좋은 사례다. 이러한 제품은 처음엔 품질 관리 실패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정반대였다. "진짜 재활용 제품이구나"라는 신뢰가 생긴 것이다. 손에 잡히는 미묘한 거칠기가 오히려 브랜드의 진정성을 증명했다. 완벽함을 포기하자 더 큰 가치를 얻은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손끝의 구체적 감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매끈한 표면보다 “정직한 표면”을 원한다. 재활용 소재의 불완전함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환 경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환경을 생각한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CMF 디자인이 '완벽한 마감'에서 '의미 있는 마감'으로 진화하고 있다. 브랜드들은 이제 묻는다. "어떻게 하면 더 매끈하게 만들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치를 더 잘 전달할까?"라고. 표면의 작은 결함이 오히려 큰 신뢰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

< NIO – Karuun >
자동차 인테리어에서 플라스틱 대신 진짜 나무를 보는 일이 늘었다. 특히, NIO의 전기차에서도 카룬(Karuun)이라는 천연 목재를 대시보드와 도어 트림에 사용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NIO는 이 나무가 "신선한 미학뿐만 아니라 자연의 안정감과 평온함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매끈하게 코팅된 가짜 나무 무늬가 아니라, 진짜 나무의 거친 결과 따뜻한 촉감을 그대로 살렸다. 나무마다 다른 무늬, 미세한 색의 차이, 작은 옹이 자국까지. 예전 같으면 불량품이었을 이 '들쭉날쭉함'이 이제는 진품의 증거가 된다. 3D 프린터로 만드는 제품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볼 수 있다. 에코닛우드(EconitWood)는 목재 가루를 섞은 프린팅 소재를 만들었는데, 일부러 나무 입자가 보이도록 했다.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을 만들 수 있는데도, 오히려 거친 질감을 선택한 것이다. 사람들이 왜 갑자기 “완벽하지 않은” 자연 소재를 찾게 됐을까?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완벽한 플라스틱에 둘러싸여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인애플 잎으로 만든 가죽, 버섯 뿌리로 만든 신발 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은 '천연 소재라서 조금 거칠어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그 거칠음에서 오히려 신뢰를 느낀다. 자연을 흉내 내는 시대에서,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CMF 디자인의 가장 큰 변화가 여기에 있다.

< Camper – ROKU >
Camper가 선보인 모듈형 스니커즈를 보자. 밑창, 갑피, 사이드 패널을 모두 분리하고 교체할 수 있다. 처음엔 단순한 A/S 편의를 위한 설계로 보였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이를 다르게 활용했다. 계절마다, 기분에 따라 부품을 바꿔가며 '나만의 신발'을 만들어갔다. 수리가 커스터마이징이 되고, 교체가 창작이 된 것이다. 닳은 부분만 바꾸니 신발의 수명도 늘어났다. 더 흥미로운 건 시간이 지날수록 신발이 “나다워진다”는 점이다. 새 제품과 헌 부품이 섞이며 만드는 독특한 조합. 그것이 착용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시그니처가 되었다. 여기서 CMF는 완성이 아닌 “진행”을 디자인한다. 색이 바래고 질감이 변하는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일부가 된다. 브랜드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소비하도록 한다. 소비자는 완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갈 여정을 산다. 모듈과 교체라는 시스템이 새로운 소비 문화를 만들고 있다. CMF가 단순한 외관 디자인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 Jay Saejung Oh – Lighting >
KIDP의 2025-26 CMF 트렌드 리포트는 네 가지 핵심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Ethically Minded'는 윤리적 소비를 표면으로 구현한다. 재활용 소재의 흔적을 숨기지 않고, 수리 가능한 구조를 드러내며, 디자인의 솔직함과 건강을 배려한다. 둘째, 'Phigital 2.0'은 물리와 디지털의 경계를 CMF로 연결한다.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홀로그래픽 마감, 온도에 반응하는 써모크로믹 잉크가 제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셋째, 'Emotional Centric Design'은 정서적 안정을 추구한다. 지문이 묻지 않는 매트 피니시, 스트레스를 줄이는 소프트 터치 코팅이 일상의 작은 평안을 만든다. 넷째, 'Materials are Heroes'는 소재 자체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나무의 결, 돌의 무늬, 금속의 광택을 있는 그대로 살려 진정성을 전달한다. 이 네 가지 트렌드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된다. 바로 'CMF를 통한 가치 전달'이다. 색상은 브랜드의 윤리를, 소재는 지속가능성을, 마감은 사용자 배려를 말한다. 기업들은 이제 CMF를 단순한 스타일링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활용한다. 표면이 곧 메시지가 되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디자인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CMF를 Value Design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다루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관계다. 브랜드와 소비자, 제품과 사용자, 현재와 미래를 잇는 관계 말이다. 좋은 CMF는 이 관계를 더 깊고 오래가게 만든다. 재활용 유리의 기포가 환경에 대한 책임을 말하고, 모듈형 구조가 지속가능한 소비를 제안하며, 에이징을 고려한 마감이 시간의 가치를 전한다.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 소비자의 구매 기준이 바뀌고, 기업의 제조 방식이 바뀌며, 결국 산업 전체의 방향이 바뀐다. CMF는 앞으로의 가치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가장 먼저 손에 닿고, 가장 오래 기억되는 접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CMF 디자인의 철학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기능과 가격의 차이가 줄어들수록, 가치와 철학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색상이나 더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우리의 약속을 더 정확히 전달하는 표면, 우리의 가치를 더 오래 지키는 마감이다. CMF가 Value Design이 될 때, 디자인은 단순한 조형을 넘어 문화가 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표면을 더 정확하고 진정성 있게 다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