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규제가 만든 디자인
2024년 유럽연합(EU)이 제정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는 산업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2027년부터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든 가전제품의 배터리는 분리가 가능해야 하며, 제조업체는 소비자가 부품을 직접 구매하고 스스로 수리할 수 있도록 설계 도면과 매뉴얼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그간 '기업 비밀'이나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굳게 봉인되었던 제품 내부가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개방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산업 디자인은 제품 내부를 가급적 얇고 견고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 집중해 왔다. 접착제를 발라 틈새를 메우고, 나사 하나 보이지 않게 마감한 매끄러운 일체형 디자인은 오랫동안 '세련됨'의 상징으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학의 이면에는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제품 전체를 버려야 하는 '계획적 진부화'가 숨어 있었다. 이제 소비자들은 묻기 시작한다. "150만 원짜리 기기가 배터리 하나 때문에 쓰레기로 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날카로운 질문은 디자인을 단순한 장식이 아닌, 제품의 구상부터 생애 주기 전체를 관통하는 정교한 계획의 영역으로 재정립하고 있다.

< 이미지 출처 : Transparent – Transparent Speaker >
보이지 않는 곳을 설계하는 즐거움
법적 규제를 피하기 위해 단순히 뒷면을 열 수 있게 만드는 임시방편은 디자인의 후퇴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앞서가는 이들은 이 위기를 자신들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로 삼는다. 디자인의 영역을 외형에서 내부 구조로 확장하며 새로운 미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영국의 가전 브랜드 'Nothing'의 선택은 파격적이다. 제품의 내부 작동 방식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디자인을 통해, 이전에는 숨겨야 했던 회로와 부품 조립 상태를 최고의 시각적 요소로 변환시켰다. 정교하게 배열된 코일과 질서 정연한 부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래픽 아트가 된다.

< 이미지 출처 : Nothing – Headphone 1>
스웨덴의 ‘Teenage Engineering'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제품은 겉모습만 미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제품 내부를 열었을 때 마주하는 회로 기판의 납땜 자국과 전선 한 가닥의 배치까지도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이들에게 디자인은 예쁜 껍데기를 씌우는 작업이 아니다. 제품이 열렸을 때 드러나는 논리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사용자가 직접 드라이버를 들고 부품을 교체하며 제품과의 상호작용을 설계하는 일이다. 뜯었을 때조차 아름다운 제품은 소비자에게 설명 없이도 제품이 얼마나 정교하게 제작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곁에 둘 만한 물건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낸다.

< 이미지 출처 : Teenager Engineering – RIDDIM>
외형을 넘어 논리를 보호하는 시대
이러한 변화는 권리 보호의 패러다임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지금까지 보호의 본질이 주로 '눈에 보이는 형태'의 유사성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제품이 어떻게 구성되고 조립되는가'라는 내부의 논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독특한 모듈식 구조, 부품 교체를 직관적으로 만드는 결합 방식, 그리고 누구나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수리 매뉴얼의 시각 언어까지 모두 브랜드의 독보적인 자산이 된다. "우리는 수리 가능하도록 설계했다"라는 선언은 단순한 환경 캠페인이 아니라, 시장에서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를 창출한다.
따라서 제품을 보호하는 일은 단순한 도용 방지 조치를 넘어,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사용자와의 신뢰를 쌓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수만 개가 쏟아지는 화려한 소모품보다, 수십 년 후에도 부품을 갈아 끼우며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교한 시스템이 더 강력한 독점력을 갖게 될 것이다. 디자인이 비즈니스 모델의 시작점부터 끝까지 밀접하게 관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작점으로서의 디자인
디자인은 산업의 마지막 공정에서 미감을 입히는 도구가 아니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제품과 사용자가 어떤 관계를 맺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시작점에 더 가깝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민이 제품의 프레임과 내부 구조,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 스며들 때, 디자인은 단순한 상품을 넘어 혁신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EU의 규제는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제한하는 사슬이 아니다. 오히려 껍데기에 가려져 있던 '내부 디자인'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우리에게 되돌려준 것에 가깝다. 이제 껍데기가 벗겨진 후에도 내가 만든 디자인이 여전히 당당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설계자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달할 때,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은 마침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