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포브랜드 최예나 대표
무신사나 더블유컨셉의 베스트셀링 탭- 검정/흰색/베이지 위주의 상품들
무신사에 접속해서 '코트'를 검색해보자. 첫 페이지를 채우는 색상은 무엇인가? 블랙, 차콜, 네이비, 베이지. 거의 예외 없이 무채색 계열이다. 이건 코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니트를 검색해도, 팬츠를 검색해도 결과는 비슷하다. 한국 온라인 쇼핑몰의 베스트셀러 섹션은 마치 흑백 영화 같다. 반면 자라나 H&M의 유럽 사이트를 열어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코발트 블루 재킷, 테라코타 팬츠, 머스타드 니트가 당당히 메인을 장식한다. 동일한 패스트패션 브랜드인데, 지역에 따라 큐레이션이 완전히 다르다. 이건 단순히 유행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진행한 국내 패션 브랜드 프로젝트에서 흥미로운 데이터를 발견했다. 똑같은 디자인의 니트를 7가지 색상으로 출시했을 때, 블랙과 화이트가 전체 매출의 68%를 차지했다. 반면 같은 브랜드의 유럽 수출 라인에서는 컬러 옵션이 52%의 판매율을 보였다. 동일한 제품, 동일한 가격인데 색상 선택만으로 지역별 판매 패턴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
한국 사회에서 '튄다'는 표현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너 오늘 너무 튀는 거 아니야?"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경고다. 이런 문화적 압력은 우리의 옷장에 그대로 반영된다. 문화심리학에서는 이를 '집단주의 문화의 동조 압력'으로 설명한다. 네덜란드 사회심리학자 Geert Hofstede의 문화 차원 이론에 따르면, 한국은 개인주의 지수가 18점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집단주의적인 국가 중 하나다. 반면 미국은 91점, 영국은 89점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다름'이 위험 신호로 작동한다. 눈에 띄는 색상을 입는다는 건 집단에서 이탈한다는 무의식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는 사회적 불안을 유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전한 색깔'을 선택한다. 블랙, 화이트, 그레이, 네이비, 베이지. 이 다섯 가지 색상은 한국 직장인의 옷장 중 평균 73%를 차지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실제로 서울 강남역 출근길을 촬영해 색상 분석을 해보면, 전체 행인 중 87%가 무채색 계열 아우터를 착용하고 있다. 같은 시기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의 비율은 42%였다. 같은 겨울, 같은 출근 시간대인데 색상 분포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 패션 브랜드들은 이 문화적 코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략을 짠다. 무신사 스탠다드를 보자. 이 브랜드의 시그니처 컬러는 블랙이다. 시즌마다 출시되는 신상품 중 블랙 옵션이 없는 아이템은 거의 없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한 전략이다.
젠틀몬스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브랜드의 매장 인테리어부터 제품 패키징, 심지어 매장 직원 유니폼까지 전부 블랙 앤 화이트다.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안전하면서도 고급스럽다." 이 전략으로 젠틀몬스터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 시장 전체를 장악했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통하는 미학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반면 29CM는 약간 다른 접근을 취한다. 이들은 '독립적이고 개성 있는' 브랜드를 표방하지만, 실제 베스트셀러를 보면 여전히 무채색이 압도적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재질'과 '디테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같은 블랙이라도 린넨 블랙, 울 블랙, 코튼 블랙으로 세분화해 '안전한 색상 안에서의 개성'을 표현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명품 시장은 어떨까? 흥미롭게도 명품 시장에서는 조금 다른 패턴이 나타난다. 샤넬 백이나 에르메스 스카프에서는 대담한 색상이 인기를 끈다. 빨간 샤넬 백, 오렌지 에르메스 버킨은 오히려 선호된다.

< 이미지 출처 : 셔터스톡 >
왜 일까? 명품은 '과시적 소비'라는 다른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명품의 경우 눈에 띄는 색상이 오히려 '나는 이걸 소화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졌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색상이 아니라 브랜드 로고가 진짜 메시지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이템에 따라 다르다. 샤넬 백은 빨간색이어도 되지만, 직장에 입고 갈 코트는 여전히 블랙이나 캐멀이 안전하다. 우리의 색상 선택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정교하게 조절된다. "요즘 젊은 세대는 다르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인플루언서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실제 판매 데이터는 다르다. 무신사의 20대 구매자 데이터를 보면, 여전히 블랙과 화이트가 1, 2위를 차지한다. 다만 그들은 '스타일링'으로 개성을 표현한다. 검은 옷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더하거나, 올 블랙 룩에 독특한 실루엣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결국 기본은 안전한 무채색이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개성을 얹는 방식이다. 이는 한국 MZ세대가 가진 이중적 정체성을 반영한다. 그들은 개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집단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안전한 베이스 + 조심스러운 포인트' 전략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컬러풀한 패션 브랜드는 살아남을 수 없을까? 그건 아니다. 다만 전략이 필요하다.
성공 사례를 보자. 골프웨어 브랜드 '마크앤로나'는 형광 핑크, 일렉트릭 블루 같은 대담한 색상을 사용하면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골프라는 특수한 맥락이 핵심이다. 골프장은 일상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은 골프장에서는 평소와 다른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직장에서는 안전한 블랙 수트를 입지만, 골프장에서는 대담한 색상으로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여유로운 나'를 표현한다. 마크앤로나는 이 심리를 정확히 파악했다. 또 다른 예는 운동복 브랜드들이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한국 라인을 보면, 일반 의류는 여전히 무채색 위주지만 러닝화만큼은 다양한 색상이 출시된다. 운동화는 '기능성 아이템'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색상에 대한 부담이 덜하다. "이 색깔이 운동에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합리화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셀프케어', '자기표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프라이빗한 공간에서는 색상 실험이 늘고 있다.홈웨어 시장을 보면 이 트렌드가 명확하다. 집에서 입는 옷은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 입지 못하던 색상에 도전한다. 라벤더 색 파자마, 민트 색 라운지웨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또한 액세서리나 스마트폰 케이스 같은 작은 아이템에서는 과감한 색상 선택이 늘고 있다. 옷 전체를 빨간색으로 입을 순 없어도, 빨간 폰케이스는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색상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가고 있다. 무채색 선호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의 미학은 '절제'와 '조화'에 있고, 무채색은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다. 문제는 선택지가 없을 때다.
브랜드 입장에서 중요한 건 이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소비자에게 안전하게 실험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젠틀몬스터가 올 블랙 선글라스로 시작해서 점차 미러 렌즈, 컬러 렌즈로 확장한 것처럼 말이다. 무채색은 한국 소비자의 기본값이다.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컬러풀한 제품을 밀어붙이는 건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대신 무채색을 베이스로 깔되, 선택적으로 색상을 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게 한국 시장에서 통하는 색상 전략이다. 다음에 쇼핑몰에서 '블랙'을 검색하는 자신을 발견하거든, 잠깐 멈춰보자. 이게 정말 내 취향일까, 아니면 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선택일까?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당신은 이미 색상 심리학의 영향권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