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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현 | 듀당스 대표

K-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

 

 

 


 

 

 

재규어가 너무 시끄럽게 죽었다면, 이 사례는 너무 조용하게 사라졌다. 아무도 비웃지 않았고,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부검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다. 이 시신에서 살펴야 할 건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아무도 이 죽음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는 걸. 2022년 8월, 창립 60주년을 맞은 한라그룹이 사명을 'HL그룹'으로 바꿨다. 한라(Halla)의 영문 이니셜이자 'Higher Life'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새 그룹 심볼은 '스트라이드(Stride)', 그러니까 성큼성큼 걸어 대담하게 도약한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졌고, 알파벳 L에는 사선으로 라이트 블루가 들어갔다.

 

한라홀딩스는 HL홀딩스로, 만도는 HL만도로, 한라는 HL D&I 한라로 계열사 이름도 한꺼번에 바뀌었다. 작업은 인터브랜드가 맡았다. 정몽원 회장은 임직원 앞에서 "젊음은 이 시대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웃음도 환호도 없었다. 디자인 매체에서 화제가 되지 않았고, 어디서도 회자되지 않았다. 같은 해 다른 그룹들의 이니셜 리네이밍, 그러니까 CJ, SK, DB, DL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모든 결정이 무난했고, 그 무난함이 정확히 이 리브랜딩의 사인이었다. 먼저 시신을 들여다보자. 새 로고를 뜯어보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미리 말해두면 이 부검의 진짜 대상은 로고가 아니다. 로고는 물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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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그룹 로고 출처 : 한라그룹 홈페이지 >

 

 

 

'HL'이라는 워드마크 자체는 죄가 없다. 볼드한 산세리프는 안정적이고, 글자만 놓고 보면 흠잡을 데가 많지 않다. 문제는 그 옆에 놓인 심볼에서 시작된다. 심볼은 사선 요소들의 조합이다. 인터브랜드는 이것을 'Stride', 대담한 도약의 형상화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형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사선들이 왜 이 각도로, 이 개수로, 이렇게 배열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이 형태 안에 없다. 좋은 심볼은 설명을 듣기 전에 형태가 먼저 말을 건다. 설명은 그 뒤에 따라와 형태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 심볼은 순서가 반대다. 'Stride'라는 단어를 먼저 듣고 나서야 "아, 그래서 사선이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는데, 그 납득은 형태의 힘이 아니라 설명의 힘이다. 설명이 사라지면 심볼도 같이 사라진다.

 

심볼이 당위성을 얻는 방법은 사실 정해져 있다. 형태 자체가 압도적으로 아름답거나, 아니면 그 형태가 어딘가에서 왔다는 근거가 있거나. 앞쪽은 드물고 위험한 길이라, 좋은 브랜드는 거의 늘 뒤쪽을 택한다. 그리고 그 어딘가가 가장 강력한 자리가 바로 자기 역사다. 스타벅스는 창립 기원에 뿌리내린 인어를 전면에 내세웠고, 버거킹은 트렌디한 안을 버리고 자기 옛 로고에서 형태를 끌어왔다. 과거에서 끌어온 형태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보는 사람이 그 연결을 다 알지 못해도, 뿌리에서 올라오는 단단함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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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10 현대양행 간판 - 출처 : 한라그룹 홈페이지 >

 

 

 

뼈때리는 말을 하자면. 한라는 그 재료를 누구보다 많이 가진 회사였다. 60년의 역사, 현대양행이라는 뿌리, 외환위기를 넘기고 다시 일어선 서사, '한라'라는 이름이 품은 한국적 무게. 재해석할 광맥이 가득했다. 그런데 새 심볼은 그중 어느 것에서도 출발하지 않았다. 사선으로 'Stride'를 형상화했다는데, 그 사선은 한라의 과거 어디에도 연결고리가 없다. 역사를 가장 많이 가진 회사가 역사와 가장 무관한 심볼을 만들었다. 끌어올 우물을 옆에 두고 빈 양동이를 들고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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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2013년 한라그룹 로고 - 출처: 한라그룹 홈페이지 >

 

 

 

당위 없는 심볼은 디테일에서 더 무너진다. 심볼에도 사선, 워드마크 'L' 안에도 사선. 그런데 두 사선 사이에 각도의 논리도, 굵기의 논리도, 시각적 연결도 없다. 그냥 두 군데에 따로 그어진 두 개의 사선이다. L 안에 사선을 억지로 밀어넣다 보니 글자 본래 형태와 사선 사이에 어색한 공간까지 남는다. 의도된 여백이 아니라 처리하지 못하고 남겨진 자리다. 위계도 무너져 있다. 심볼도 강하게, 워드마크도 볼드로 강하게. 둘 다 소리치니 시선이 어디서 쉴지 길을 잃는다. 좋은 로고는 하나가 주연이고 하나가 조연인데, HL은 둘 다 주연이 되려다 둘 다 인상에 남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사선 조형 자체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사선으로 속도와 도약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미 수많은 기업이 써온 조형이라, HL의 심볼을 보고 떠오르는 건 HL이 아니라 비슷한 사선을 쓴 다른 회사들이다. 정체성을 세우라고 만든 심볼이 오히려 다른 브랜드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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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그룹의 BX가 적용된 제품 출처 : 한라그룹 인스타그램 >

 

 

 

그리고 지금부터가 진짜 부검이다. 이 로고에는 최소 네 개의 명백한 결함이 있다. 뿌리 없는 심볼, 호응하지 않는 두 사선, 처리되지 못한 음각, 위계 없는 과한 강조.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시안 단계에서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만 한다. 이 네 개의 결함은 왜 걸러지지 않았는가. 인터브랜드는 한국에서 가장 잘하는 에이전시 중 하나다. 그들이 이걸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이 안이 통과되는 어느 자리에서도, 이게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거나, 말했어도 들리지 않았다.

 

리브랜딩 결과물은 결국 회의실에서 결정권이 가장 큰 사람이 보고 싶은 것의 모양으로 도착한다. 에이전시가 다섯 개의 안을 가져갔든 열 개를 가져갔든, 마지막에 살아남는 안은 늘 같은 종류다. 가장 안전한 안, 가장 익숙한 안, 결정권자가 한 번에 "좋네"라고 말할 만한 안. 그리고 그 결정권자가 동시대의 시각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살아남는 안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진다. 회장이 "젊음은 이 시대의 명령"이라고 선언한 회의실에는 그 젊음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앉아 있지 않았던것 같다.

 

문제는 이 결정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잘못된 결정은 어디에나 있다. 진짜 문제는 잘못된 결정이 통과된 뒤에도 아무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고가 공개되고, 명함이 다시 인쇄되고, 사옥 간판이 교체되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조직 안의 누구도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라고 묻지 않았다. 혹은 물었더라도 그 질문이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다. 미감이라는 건 원래 조용한 감각이라, 그것이 없을 때 경보음이 울리지 않는다.  세 가지를 묶으면 한 문장이 남는다. 이 조직에는 이게 구리다고 말할 사람도, 구리다고 느낄 감각도, 구린 걸 부끄러워할 문화도 없었다.

 

이게 무서운 건, 다시 한번, HL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많은 조직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각의 완성도를 판단할 감각이 의사결정의 정점에 없고, 그 부재를 지적할 통로도 막혀 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재무제표가 틀리면 누군가 책임을 지지만, 미감이 틀리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직의 시각은 가장 위에 앉은 사람의 감각에서 멈춘다. 그 사람이 멈춘 자리에서, 조직 전체의 미감도 함께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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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L그룹 오픈이노베이션 공모 포스터 내 적용된 한라그룹 아이덴티티변형 출처 : 한라그룹 홈페이지 >

 

 

 

HL그룹이 외부와 함께 연 오픈이노베이션 공모 포스터에는, 그룹의 공식 아이덴티티가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된 채 적용되어 있다. 누가 잘못 썼느냐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변형이 외부로 나가기까지 아무도 잡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브랜드가 적용되는 모든 표면을 지켜보면서 "이건 규칙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조직 안에서 브랜드의 일관성을 감독하는 그 자리가 HL에는 비어 있다. HL그룹은 로고를 샀지만, 로고를 가꿀 사람을 두지 않았다.

 

이것이 미감이 멈춘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로고가 구린 걸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그 침묵은, 로고가 만들어진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포스터에서 아이덴티티가 흔들려도, 어디선가 브랜드가 규칙 없이 쓰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멈춰 세울 감각이 조직 안에 없다. 처음 한 번의 침묵이 이후 모든 적용의 침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멈춘 미감은 로고 한 장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세상에 나가는 모든 표면에서 조금씩 새어 나온다.

 

결정권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그 어색함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접힌다. 다들 안다. 여기서 그걸 말하는 건 디자인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 이야기가 된다는 걸. 그렇게 한 번 접힌 어색함은 다음 회의에서 더 쉽게 접히고, 결국 조직은 어색함을 느끼는 능력 자체를 잃어간다. 그래서 로고는 조직의 표정이다. 표정이 굳었다면 문제는 얼굴이 아니라 그 안에 있다. 좋은 시각을 원하는 조직이 먼저 부를 사람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건 구리다'고 말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그 말이 위까지 닿을 통로도 없다면,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를 불러도 결과는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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