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어 김주황 대표 (브만남)
<K-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
헤일리 비버의 스무디로 알려진 ‘스트로베리 글레이즈 스킨 스무디’는 한 잔에 무려 22달러, 우리 돈으로 하면 약 3만원에 달한다. 이 브랜드는 바로 ‘에레혼(Erewhon)’. 로스앤젤레스 베벌리 힐스 매장 앞, 매일 기묘하고도 활기찬 풍경이 펼쳐진다. 선글라스를 낀 인플루언서와 할리우드 스타들이 손에 핑크빛 음료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헤일리 비버의 맑은 피부와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는 이들은 기꺼이 줄을 서서 돈을 지불한다. 틱톡을 장악한 이 스무디는 매달 4만 잔 이상 팔리며 폭발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들에게 이 음료는 단순한 주스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 상에서 자신의 건강한 삶과 세련된 안목을 증명하는 일종의 '시각적 명함'이자 가장 힙한 웰니스 굿즈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열광은 경이적인 비즈니스 성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에레혼은 단 10여 개 매장만으로 2023년 기준 약 1억 7,140만 달러(약 2,300억 원)의 이익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마트의 평균 순이익률이 1.6% 내외인 것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성이다. 특히 에레혼의 평당 매출은 약 2,500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미국 일반 식료품점 평균의 4배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로 세계적인 명품 매장에 버금간다. 전체 체인의 연간 매출액은 약 7억 5,000만 달러로 추정되며, 헤일리 비버 스무디 단 하나로만 연간 1,060만 달러(약 14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에레혼은 유통업의 고정관념을 깨고, 식료품 매장을 프리미엄 가치를 경험하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쇼룸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브랜드의 시작, 과연 어땠을까?
에레혼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영국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가 1872년에 발표한 풍자 소설 《Erewhon》에 닿아 있다.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의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아나그램이다. 소설 속 에레혼은 질병을 지독한 범죄로 취급하여 개인이 스스로의 건강과 신체를 완벽하게 책임져야 하는 기묘한 유토피아다. 건강을 가장 숭고한 도덕적 의무이자 책임으로 규정하는 이 철학적 세계관은 1960년대 미국으로 이주했던 한 일본인 부부에 의해 현실의 비즈니스로 구현되었다.

< 이미지 출처 : TheCut >
그 사상적 깊이를 채운 주인공은 일본의 전통 식문화인 '매크로바이오틱스(장수법)'를 미국에 전파하려던 쿠시 미치오와 아벨린 부부였다. 매크로바이오틱스란 제철 유기농 농산물과 현미 같은 통곡물, 채소를 중심으로 식단을 구성하며 정제 설탕, 화학 첨가물, 가공식품, 육류와 낙농 제품의 섭취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자연 식생활법이다. 쿠시 부부는 가공식품으로 황폐해진 미국 식문화를 정화하겠다는 신념으로 1966년 보스턴 지하의 작은 가판대에서 미국 최초의 유기농 자연식품점 에레혼을 열었다. 이들은 직접 계약한 농가의 유기농 곡물과 전통 된장을 판매하며 미국의 초기 웰니스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선구적인 철학이 사업의 지속 성공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농가들과 직거래하며 유기농 운동의 표준을 세웠던 에레혼은 무리한 확장과 유동성 관리 실패로 1981년 11월 부채 430만 달러를 안고 파산 보호 신청을 한다. 본사 시리얼 사업부와 제조 부문은 여러 대기업에 인수되며 흩어졌고 브랜드마저 단종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1969년 로스앤젤레스 베벌리 대로에 세웠던 지점은 독립적인 매장으로 분리되어 살아남았다. 파산 직전 직원이었던 톰 디실바가 매장을 인수하여 동네 주민들을 위한 친근한 로컬 유기농 식료품점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지금의 화려한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 결정적 전환점은 2011년 토니와 조세핀 안토치 부부가 에레혼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원래 뉴욕의 상징적인 식료품점인 '딘앤델루카'의 LA 가맹점을 열려고 했으나 계약이 무산되자 대안으로 에레혼을 인수했다. 안토치 부부는 에레혼의 '정통 유기농 철학'이라는 원석에 현대적인 '럭셔리 미학'을 결합했다. 아내 조세핀 안토치는 매장의 모든 제품 성분을 철저하게 심사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보존제나 GMO 성분은 매대에서 차단되었다. 소비자들은 "에레혼 매대의 제품은 믿고 사도 된다"는 절대적 신뢰를 보냈고, 이는 높은 가격 저항을 무너뜨린 핵심 열쇠가 되었다.

이후 에레혼은 본격적인 스케일업을 도모하며 '에레혼 2.0' 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실행한 성장 전략의 첫 번째 핵심 기둥은 대규모 백엔드 운영 인프라의 구축이었다. 에레혼은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버넌에 6만 5,000평방피트 규모의 최첨단 중앙 주방(Commissary Kitchen)을 건립했다. 350여 명의 전문 인력이 상주하는 이 시설은 시그니처 조리 식품들을 극도로 균일한 품질로 대량 생산해 매일 아침 각 지점으로 배송한다. 이 인프라는 에레혼의 최대 고마진 엔진인 조리 식품과 주스 바의 마진율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비즈니스 장벽이 되었다.
두 번째 기둥은 공급업체와의 철저한 '페이 투 플레이(Pay-to-play)' 파트너십 메커니즘이다. 에레혼의 스타 스무디에 원료를 공급하려는 브랜드들은 스무디 레시피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자사 제품이 에레혼 매장에 이미 입점해 있어야 하는 자격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파트너 브랜드들은 직접적인 판매 수익을 분배받지 못하는 대신 에레혼이 제공하는 막강한 후광 효과를 누린다. 실제로 솔트앤스톤(Salt & Stone)이나 보카(Boka) 같은 브랜드들은 협업 이후 소셜 미디어 노출과 매출이 폭발적으로 동반 상승했다. 에레혼은 자체 마케팅 비용 없이 바이럴 루프를 무한히 생성하는 영리한 플랫폼 비즈니스를 정착시켰다.
세 번째 기둥은 소속감과 독점성을 자극하는 고객 경험 설계다. 에레혼은 일반 마트의 넓은 통로 대신 의도적으로 설계된 4피트(약 1.2미터) 너비의 좁은 통로를 고집하는데, 이는 고객과 직원 간의 자연스러운 눈맞춤과 사교적 친밀감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연회비 200달러 규모의 '라이프스타일 컬렉티브' 유료 멤버십을 통해 6만 명의 견고한 충성 고객층을 확보했다. 이들은 알로 요가, 애슬레타 등 프리미엄 웰니스 브랜드들과 연계된 특별 혜택을 누리며 커뮤니티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얻는다. 여기에 2026년 예정된 뉴욕 맨해튼 '키스 아이비' 클럽 내 입점 계획처럼, 브랜드의 희소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배달 서비스를 접목하는 하이브리드 식의 시퀀싱 확장 전략을 적용했다.

에레혼의 독주는 오늘날 프리미엄 웰니스 시장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사회 문화적 메가 트렌드로 안착했음을 선포한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물질의 사치를 넘어, 자신의 신체적 자산과 정신적 안녕을 가꾸는 '라이프스타일의 영양학'에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결국 개인의 건강일테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프리미엄이며 웰니스라는 것을 보여주는 브랜드 사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