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jpg

 

이지원 박사 | 벨류포머 대표

 

 

 


 

 

 

요즘 AI에게 "로고를 만들어줘"라고 말하면 몇 초 안에 수십 개의 시안이 쏟아져 나온다. 앱 화면을 설계해달라고 하면 와이어프레임부터 비주얼 목업까지 순식간에 완성된다. 포스터도 만들고 브랜딩 가이드도 만들고 심지어 건축 스케치까지 그려낸다. 결과물의 퀄리티도 놀라울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이 상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한다. "디자이너가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지만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무엇이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디자인 전략의 여러 층위를 다뤄왔다. 관점을 설계하는 일과 구조를 설계하는 일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설계하는 일. AI의 등장은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하나의 질문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디자인에서 진짜 가치는 '결과물'에 있는가 아니면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가.

 

 

 

1 - 복사본.png

 

 

 

AI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AI가 잘하는 것은 명확하다. 완성된 결과물을 빠르게 생산하는 일이다. 로고 시안을 만들고 레이아웃을 구성하고 색상 조합을 제안하는 일. 이런 작업에서 AI는 이미 사람보다 빠르고 때로는 품질 면에서도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결과물이 가지는 공통점이다. 명확한 입력(프롬프트)이 주어지면 명확한 출력(결과물)이 나오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런데 디자인의 현실은 대부분 이 구조로 작동하지 않는다. "로고를 만들어줘"라고 AI에게 말하기 전에 누군가는 "왜 지금 로고가 필요한가" "이 브랜드가 전달하려는 가치가 무엇인가" "타깃 사용자는 이 브랜드를 어떤 맥락에서 만나는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프롬프트를 입력하기 전에 프롬프트 자체를 설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AI가 대신해줄 수 없다.

 

왜 그런가. 이 과정에는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행동의 이유를 해석하는 일이 포함된다. 비즈니스의 맥락과 시장의 흐름을 읽고 그 안에서 디자인이 풀어야 할 진짜 문제를 정의하는 일이 포함된다. 서로 상충하는 요구사항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트레이드오프를 결정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런 일들은 "입력 → 출력"의 구조가 아니라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해석하고 결정하는 과정이다. AI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이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다.

 

 

 

이 시리즈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해온 이유

 

돌이켜보면 이 칼럼 시리즈가 처음부터 다뤄온 것이 바로 이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글에서 '관점을 디자인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과물을 만들기 전에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두 번째 글에서 '구조를 디자인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눈에 보이는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진짜 디자인이라는 이야기였다. 스타벅스를 다루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는 결과물 뒤에서 작동하는 구조의 설계가 결과물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이소를 다루며 '제약이 디자인한다'고 했을 때는 결과물을 만들기 전에 올바른 제약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디자인의 진짜 가치는 최종 결과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관점을 세우고 구조를 잡고 문제를 정의하고 제약을 설정하는 일련의 판단과 설계)에 있다는 것이다. AI의 등장이 이 사실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셈이다.

 

 

 

사용자를 이해하는 일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AI에게 "60대 사용자를 위한 건강 관리 앱을 디자인해줘"라고 요청하면 큰 글씨와 높은 명도 대비를 갖춘 깔끔한 UI가 나올 것이다. 결과물로서는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결과물이 실제로 60대 사용자에게 작동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60대 사용자가 건강 앱에서 진짜 불안을 느끼는 지점은 글씨 크기가 아닐 수 있다. "이 데이터가 어디로 가는 거지?"라는 개인정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일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누르면 돌이킬 수 없는 건 아닐까"라는 조작 실수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혹은 자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사용자를 직접 만나서 관찰하고 대화하고 그 맥락을 해석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데이터셋에서 추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고 어떤 조건에서 안심하며 어떤 순간에 행동을 멈추거나 계속하는지를 이해하는 일. 이것은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화면을 그려낸다 해도 이 과정을 건너뛴 결과물은 겉만 그럴듯할 뿐 실제 사용자의 삶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과정은 더 중요해진다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AI가 결과물을 만드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과정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의 믿음은 그렇다. 결과물을 만드는 데 몇 주가 걸리던 시절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정할 시간이 있었다. 디자이너가 시안을 만들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는 반복 속에서 문제가 정의되고 방향이 다듬어졌다. 그런데 AI가 몇 초 만에 결과물을 완성해버리면 이 자연스러운 수정의 시간이 사라진다. 시작점에서 방향이 잘못 잡히면 잘못된 결과물이 순식간에 대량으로 쏟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AI 시대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시작점의 품질이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사용자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비즈니스의 맥락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가. 이 시작점이 정확할수록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도 의미 있어지고 부정확할수록 쓸모없는 결과물만 쌓인다. 결국 AI의 속도를 가치로 전환하는 것은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과정을 설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들

 

이 칼럼 시리즈의 첫 글에서 디자인은 그리는 일이 아니라 관점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AI가 그리는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되면서 이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점점 더 정교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전에 누군가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사용자의 맥락을 이해하며 비즈니스의 구조 안에서 디자인이 풀어야 할 진짜 문제를 정의해야 한다. 이 과정은 자동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실 나 자신이 디자인을 해온 방식도 결과물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인간의 언어와 컴퓨터 언어를 공부하며 인간과 컴퓨터가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들여다보았고, 그 관심은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디에서 가치를 느끼는며 이를 컴퓨터를 매개로 어떻게 전달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후 사용자가 직접 참여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을 설계하면서, 내가 실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 위에서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과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지금 ValueFormer에서 인간중심의 관점과 디자인 방법론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AI 엔진을 개발하고, 그 엔진을 탑재한 솔루션을 만드는 일도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기술이 표면을 빠르게 대신 그려줄수록 사람을 이해하는것이 오히려 모든 설계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믿는다.

 

디자이너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결과물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과정을 설계하는 디자이너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AI가 전자의 영역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지금 후자의 역량(관점을 세우고 구조를 잡고 사용자를 이해하며 문제를 정의하는 일)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결국 AI 시대에 디자이너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결과물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계하고 있는가.

  • Founder: Doyoung Kim
  • Business Registration Number: 454-86-01044
  • Copyright © DESIGNSORI Co., Ltd.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