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랙더넛츠 송창렬 대표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대한민국광고대상> 심사위원
수많은 에이전시들이 자신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있다. 모두가 경계를 부수고, 클라이언트와 한 팀처럼 협업하며, 브랜드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탄탄한 전략, 예상을 뛰어넘는 크리에이티브, 하이브리드, 경계 파괴,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한다는 주장, 심지어는 이제는 광고에서조차 벗어난다는 선언까지 더해진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 역시 더 이상 차별화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여기에 최근에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더해졌다. 바로 AI다. 누구나 AI를 이야기한다. AI로 크리에이티브를 혁신한다는 선언, AI를 활용한 새로운 마케팅 방법론, AI를 통해 효율과 속도를 높이겠다는 다짐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제는 에이전시를 구분 짓는 차별점이 되지 못한다. 결국 진정한 차이는 여전히 하나의 단어, 하나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TBWA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는 단연 Disruption®이다. 광고는 기존의 질서를 깨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TBWA는 Disruption을 단순한 카피가 아니라 체계적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현재의 질서(Convention)’를 정의하고, 이를 깨뜨릴 파괴적 아이디어(Disruption)를 찾아내며, 그 결과 도달해야 할 비전(Vision)을 설정하는 구조다. 이 프레임워크는 전 세계 TBWA 오피스에서 동일하게 공유되는 공통 언어이자 전략적 툴로 자리 잡았다. 특히 TBWA는 Disruption Day라는 독자적 워크숍을 운영하며, 클라이언트와 함께 브랜드가 직면한 기존의 질서를 도출하고 이를 깨뜨릴 파괴적 기회를 탐색하는 과정을 실제로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Disruption®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캠페인을 설계하는 실질적 툴로 기능했고, 워크숍에서 도출된 인사이트는 크리에이티브 브리프와 전략적 방향으로 이어졌다. 결국 TBWA는 이 단어 하나로 자신들의 철학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클라이언트와의 협업 속에서 전략적 차별성을 입증했다. Disruption®은 광고 업계에서 TBWA의 대체 불가능한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Leo Burnett은 광고를 인간 중심으로 재정의했다. 그들을 규정하는 단어는 Humankind였다. 그 철학은 명확하다. “Creativity has the power to transform human behavior.” 즉, 크리에이티비티는 단순히 주목을 끄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을 기반으로 Leo Burnett은 광고를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경험으로 만들고자 했다. 맥도날드, 켈로그, P&G 같은 대중 브랜드 캠페인 속에는 언제나 사람의 삶, 감정, 행동 변화를 중심에 두는 Humankind 철학이 깔려 있다. 특히 Humankind는 단순한 슬로건에 머물지 않았다. 실제 방법론으로 정립되어 전 세계 오피스에서 공유되는 전략적 툴로 사용되었고, ‘Humankind Brief’라는 독자적 브리프 양식을 통해 모든 캠페인이 사람을 중심으로 출발하도록 했다. 광고 아이디어의 시작점이 제품이나 시장이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행동 변화’가 되도록 강제하는 장치였다. 즉, Humankind는 철학이자 프로세스였고, 내부 직원들에게는 일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그 결과 Leo Burnett은 ‘사람을 위한 광고’를 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광고’를 지향할 수 있었다. Humankind라는 단어는 내부 구성원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분명한 기준이 되었고, 외부 클라이언트에게는 ‘사람 중심의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라는 신뢰를 심어주었다.

Saatchi & Saatchi는 단순히 브랜드(Brand)가 아닌 러브마크(Lovemark)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 개념은 2004년 당시 CEO였던 Kevin Roberts가 제안한 것으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사랑하고 충성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Lovemarks는 존경과 사랑(Respect + Love)의 교차점에서 탄생한다. 브랜드가 단순히 기능이나 가격 경쟁을 넘어 소비자의 감정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Lovemarks는 단순한 개념 제안에 그치지 않았다. Kevin Roberts는 『Lovemarks: the Future Beyond Brands』라는 책을 출간하며 이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Saatchi & Saatchi는 이를 기반으로 클라이언트 워크숍과 프레임워크를 운영하며 실제 캠페인 전략에 접목했다. 이는 글로벌 마케팅 업계에 “브랜드는 존경을 얻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소비자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라는 강력한 화두를 던졌다. 물론 지금은 Lovemarks라는 개념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 시대 동안 Saatchi & Saatchi의 정체성을 각인시키고, 글로벌 에이전시 브랜딩을 빌드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Lovemarks는 에이전시 브랜딩에서 한 단어가 철학이 되고, 철학이 곧 방법론과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국내 독립 에이전시 아이디엇(Idiot)은 자신들의 철학을 SOLVERTISING (SOLUTION + ADVERTISING)으로 정의했다. 광고(Advertising)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Solve)하는 광고라는 의미다. 광고주의 문제는 단순히 광고를 만드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시장에서의 포지셔닝, 소비자의 인식, 제품의 경험까지 다층적으로 얽혀 있다. 아이디엇은 SOLVERTISING™이라는 단어로 자신들을 단순한 광고 제작사가 아닌 브랜드 문제 해결사로 포지셔닝했다. 이 단어는 클라이언트에게 “우리는 광고가 아니라 해답을 드립니다”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광고를 넘어 비즈니스 솔루션 파트너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크랙더넛츠 역시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CRACKtivity™다. CRACKtivity는 CRACK(균열)과 Activity(활동)의 합성어로, 소비자 여정 속에 ‘균열’을 일으켜 브랜드와 비즈니스의 숨겨진 잠재력을 깨우는 활동을 뜻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슬로건을 넘어 크랙더넛츠의 모든 서비스와 철학을 관통한다. 브랜드 컨설팅, 커뮤니케이션, PR, 마케팅, 내부 브랜딩까지 모든 활동은 결국 “어디서 균열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CRACKtivity™는 내부적으로는 일하는 방식의 기준이자, 외부적으로는 “우리는 그냥 광고회사/브랜딩사가 아니라 브랜드 잠재력을 깨우는 회사다”라는 선언이다.
한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클라이언트에게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포지셔닝을 제공하고, 내부 구성원에게는 일하는 방식과 이유를 명확히 정리해 주며, 방법론을 구축해 철학을 실제 실행으로 전환하게 하고, 시대와 캠페인을 넘어 변치 않는 아이덴티티를 유지시킨다. TBWA의 Disruption, Leo Burnett의 Humankind, Saatchi & Saatchi의 Lovemarks, 아이디엇의 Solvertising이 보여주듯, 철학은 선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구체화될 때 진정한 힘을 가진다.
에이전시는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정의하는 데에는 능숙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는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결국 에이전시 브랜딩의 핵심은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철학을 담은 한 단어다. TBWA가 Disruption으로, Leo Burnett이 Humankind로, Saatchi & Saatchi가 Lovemarks로, 아이디엇이 Solvertising으로 자신을 정의했듯, 에이전시가 던지는 한 단어는 차별점이고 구심점이다. 그리고 곧 방법론이자 존재 이유다. 특히 AI가 모든 곳에서 언급되는 지금 시대일수록, 에이전시를 정의하는 단어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기술이 아니라 철학, 도구가 아니라 태도가 차이를 만든다. 에이전시 브랜딩은 결국 한 단어의 힘으로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