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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더넛츠 송창렬 대표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대한민국광고대상> 심사위원

 

 

 


 

 

 

축음기 앞의 강아지, 니퍼(Nipper)가 가르쳐준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본질과 중요성

 

2025년의 마지막 주를 강릉에서 보내게 되었다. 연말이라는 시간의 여유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우연히 참소리 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오래된 발명품들이 전시된, 그저 조용한 박물관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도슨트 투어가 시작되자 공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기계와 기술의 설명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해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제 한 브랜드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등장한 존재가 바로 한 마리의 개, 니퍼(Nipp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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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His Master’s Voice (HMV) Official Archive >

 

 

 

커다란 나팔형 축음기 앞에 앉아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작은 개, 그리고 그 옆에 적힌 문장 ‘His Master’s Voice’. 나는 이 이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공간에서 들은 이야기는 단순한 로고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의 역사가 아니라 브랜드가 어떻게 탄생하고 기억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물관을 나설 때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투어는 발명품을 본 시간이 아니라, 브랜드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남는지를 배운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도슨트가 들려준 니퍼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니퍼는 주인과 함께 축음기로 음악을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니퍼의 주인은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은 니퍼는 소리가 나는 축음기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음악이 끝나면 언제나 자신을 불러주던 주인의 목소리, ‘His Master’s Voice’가 다시 들리기를 기다리며. 단편적으로 들으면 굉장히 아련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만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보면 이 서사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이후에 덧붙여진, 말 그대로 ‘만들어진 이야기’에 가깝다. 화가 프랜시스 바라드가 자신의 강아지가 축음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그리고, 그 위에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입힌 것이 이 이미지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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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촬영지 :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 >

 

 

 

니퍼는 1880년대 영국 브리스틀에서 실제로 살았던 개였다. 프랜시스 바라드는 형이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니퍼를 맡아 기르며, 개가 축음기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 그림이 훗날 ‘His Master’s Voice’라는 제목으로 알려지며 음악 산업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니퍼가 죽은 주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브랜드 서사로서 완성된 감성적 각색에 가깝다. 니퍼는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림 속 장면은 관찰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재구성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강력한 브랜드 자산이 되었다. 프랜시스 바라드는 처음 이 그림을 에디슨 벨 회사에 팔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그라모폰 컴퍼니가 그림을 구매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그림 속에 있던 에디슨식 실린더 축음기를 회사의 요청에 따라 디스크형 그라모폰으로 수정해 그렸다는 점이다. 니퍼 이미지는 처음부터 순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브랜드의 필요에 맞춰 재설계된 상징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니퍼는 영국의 HMV, 미국의 Victor, 그리고 RCA Victor를 거치며 20세기 음악 산업 전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HMV는 EMI로 이어지고, 다시 워너뮤직으로 인수·합병되며 더 거대한 음악 산업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었지만, 그 모든 흐름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축음기 앞에 앉은 한 마리의 개가 있었다.

 

스펙은 설명을 요구하지만, 이야기는 공감을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사람들은 축음기의 구조를 기억하지 않고 니퍼를 기억할까. 왜 수백 가지의 기술 설명보다 한 마리 개의 이야기가 더 오래 남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은 정보를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를 기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머리에 남지만, 서사는 마음에 남는다. 니퍼 이야기가 완벽한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래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축음기라는 복잡한 기술을 인간적인 의미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소리가 저장된다”는 기술적 설명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장면을 제시했을 때, 기계는 더 이상 차가운 장치가 아니라 감정의 매개체가 된다. 니퍼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 기능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브랜드가 탄생했다.

 

오늘날의 브랜드들도 같은 원리 위에서 움직인다. 나이키는 운동화의 소재를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의 도전을 이야기하고, 코카콜라는 음료의 성분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순간을 보여준다. 애플은 칩셋의 성능이 아니라 창의적 삶의 방식을 말한다. 성공한 브랜드는 언제나 기능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기능이 만들어내는 삶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물론 스토리텔링이 아무 이야기나 만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니퍼의 사례가 보여주듯, 스토리텔링은 거짓을 꾸미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과 제품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저장용량이라는 숫자는 “아이의 첫 목소리를 오래 남긴다”는 의미로, 주파수 응답이라는 지표는 “사랑하는 이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듣는다”는 경험으로 바뀔 때 비로소 브랜드가 된다. 특히 AI가 범람하며 문장과 카피가 쉽게 복제되는 시대일수록, 브랜드의 깊이는 인위적인 문구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서사에서 만들어진다.

 

강릉에서의 그 짧은 투어는 나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브랜드에게 스토리텔링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라는 사실이다. 제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사람의 삶과 연결해 주는 이야기가 없다면 브랜드는 평면적인 이름으로 남는다. 반대로, 잘 설계된 서사는 기술을 기억으로 바꾸고, 기능을 의미로 확장한다. 니퍼 이야기는 바로 그 과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박물관을 나오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만드는 브랜드는 지금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숫자와 사양의 언어인가, 아니면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이야기의 언어인가. 결국 브랜드의 깊이는 기술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깊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스토리텔링이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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