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도전 과제 중 하나는 인구 유출로 인한 지방 소멸이다. 지자체들은 수많은 정책과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UNDP에서도 복합적 문제(Complexed Problem)로 분류하는 글로벌 이슈로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디자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건물을 짓거나 관광 상품을 미적으로 포장하는 수준을 넘어, 지역이라는 공간이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를 재정립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설계하듯이, 이제는 지역의 존재적 가치를 디자인해야 할 시점이다.
로컬 디자인은 단기적인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하는 마케팅을 넘어, 지역의 정체성, 연결성, 순환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회복하고 증폭시키는 디자인적 역할의 중요한 실험장으로 기능한다. “국중박” 신드롬은 로컬이 어떻게 가치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0여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 기념품 숍을 떠올리면, 유물 사진을 인쇄한 열쇠고리나 다소 촌스러운 부채와 책갈피가 주요 품목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박물관의 ‘기념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뮷즈(MUDS)’로 재탄생한 국립박물관 굿즈는 올해 10월 기준 매출액 300억 원을 넘어섰고, 관람객이 크게 증가해 박물관이 본래의 정숙함을 다시 호소해야 할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디자인팀 디자이너들의 기획과 검수를 거쳐 완성된 제품 자체의 품질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MZ세대에게 박물관 기념품은 ‘굿즈’라는 이름 아래 예쁘고 실용적이며 애국적이기까지 한 아이템으로,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만한 트렌디한 콘텐츠로 재해석되었다. 동일한 ‘한국의 전통’이라는 소재가 디자인 역량과 품질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만나 전혀 다른 가치로 해석된 사례로서, ‘촌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의 차이는 소재가 아니라 디자인적 해석의 깊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원리는 한국의 지방 커뮤니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넓은 세계 속에서 작은 국가인 한국이 K-pop과 K-drama를 통해 글로벌 무대에서 고유한 언어를 구축한 것처럼, 각 지역 역시 자신만의 정체성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며 사람들과 연결되는 방식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정체성(Identity)은 로컬 디자인이 다루는 첫 번째 가치다. 모든 지역에는 고유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가 묻혀 있거나 현재의 감성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야기를 메타포로 포장하거나 은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도 가능하지만, 때로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전략이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경북 김천시는 젊은 세대가 ‘김천’을 떠올릴 때 ‘김밥천국’을 먼저 연상한다는 조사 결과를 직면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김밥축제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축했다. 김밥 꼬다리에서 착안한 캐릭터 ‘꼬달이’, 뻥튀기 접시 같은 친환경 아이디어 등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며 MZ세대가 찾는 새로운 로컬 놀이터로 자리 잡았다. 서울국제불교박람회는 ‘젊은 불교, 힙한 불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풍선껌을 부는 부처 굿즈, ‘중생아 사랑해’ 키링 등 전통과 현대미학을 결합한 콘텐츠로 2030세대를 사로잡았다. 또한 ‘뉴진스님’을 수용하는 불교계의 과감한 시도 역시 더해지면서, 낯설고 정적이던 불교 문화가 ‘힙트래디션’의 아이콘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정체성 디자인의 핵심은 지역의 본질적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데 있다. 단점이나 오해조차도 디자인이라는 가치의 과정을 거치면 가장 강력한 차별점이 될 수 있다. 연결성(Connectivity)은 로컬 디자인의 두 번째 핵심 가치다. 로컬 디자인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는 관계의 매개체로 기능해야 한다. 강원도 양양은 한때 강릉과 속초 사이에 자리한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서핑 전용 해변인 서피비치가 조성되면서 전혀 다른 지역으로 재탄생했다. 서피비치는 단순한 해변을 넘어 젊음과 자유로움의 상징이 되었고, 이러한 사람 간의 연결은 주변 상권과의 상생을 촉진하며 지역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로컬의 연결은 수평적 관계를 넘어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시간의 수직적 연결로 확장될 수 있다. 일본 나오시마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쇠퇴하던 도시를 현대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작품 공간으로 재해석하였다. 버려진 도시가 미술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과거의 흔적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했고, 이러한 경험을 미래 세대까지 이어갈 수 있는 시간적 연결을 만들어냈다.

< Walter De Maria Seen (Unkonwn, 2000) - 베네스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
연결성의 핵심은 ‘무엇을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관광객만을 위한 디자인은 지역 주민을 소외시키고, 과거를 지우는 개발은 지역의 서사를 단절시킨다. 지역이라는 공간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함께 공유되는 장소라는 가치로부터 디자인이 출발해야 한다. 순환성(Circularity)은 로컬 디자인의 세 번째 가치다. 많은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가 초기의 화제성 이후 동력을 잃고 소멸한다. 축제가 끝나면 잊히고, 보조금이 끊기면 멈춰버리는 일회성 이벤트로 전락하는 사례가 반복된다. 강릉은 안목해변의 자판기 커피에서 출발해 2009년 강릉시가 직접 커피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강릉 하면 커피’라는 인식을 확립했다. 하나의 콘텐츠가 축제, 커피거리, 도시 브랜드로 확장되며 자생적 생태계를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다.

< 커피거리의 시초인 안목해변 커피자판기 >
일본 구마모토현은 ‘쿠마몬’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소멸 위기를 극복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지자체가 주도한 캐릭터 브랜딩은 상품과 관광, 시민 참여로 확장되며 도시 전체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브랜딩 수익이 다시 사회적 인프라로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된 결과이다. 순환성은 단순히 무엇을 오래 반복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지역이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가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며 지속되는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지역의 ‘존재적 가치’를 디자인하는 일은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변신, 김천의 역발상, 양양의 재탄생이라는 사례가 보여주듯이, 디자인의 본질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가치를 발견하고 연결하는 데 있다. 한국이 글로벌 무대에서 ‘K’라는 접두어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한 것처럼, 이제 각 지역도 자신만의 언어를 찾을 때가 되었다. 그것은 서울을 모방하는 것도, 과거에 머무르는 것도, 단기적 이벤트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약점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해석하는 정체성,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는 연결성, 발굴된 가치가 지역 안에서 순환되는 순환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지역 소멸 문제를 대응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가치들이다. 모든 지역에는 고유한 역사와 사람이 존재한다. 그 이야기를 발견하고 현대의 언어로 번역하며, 사람과 시간을 연결하는 일은 디자이너가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 역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