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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형 | 인덕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생활 속 시각디자인 저자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파리에 에펠탑이 있고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면, 서울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있다. 그리고 타이베이에는 송산 문화창의지구가 있다. 이 두 공간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창조적 에너지를 상징하며, 동아시아 디자인 문화의 진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22년 구글 맵은 전 세계 10대 문화 랜드마크 중 하나로 송산 문화창의지구를 선정했다. 같은 해, 서울의 DDP는 누적 관광객 수가 급증하며 서울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두 공간 모두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흥미롭게도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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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베이시 신이구에 있는 송산문화 창조단지 >

 

 

 

미래를 향한 곡선, DDP의 급진적 변화

 

2014년 3월 21일, 서울 동대문에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 등장했다. 영국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품처럼 동대문 한복판에 우뚝 섰다. 45,133장의 은색 알루미늄 패널로 뒤덮인 유선형 외관은 ‘서울 성곽을 둘러싸는 건축적 풍경’을 표현한 것이었다. 자하 하디드는 DDP를 설계하며 ‘이른 새벽부터 밤이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동대문의 역동성’에 주목했다. 곡선과 곡면, 사선과 사면으로 이뤄진 특유의 건축 언어로 자연물과 인공물이 이음매 없이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건물은 수평선이나 직각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비정형’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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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

 

 

 

DDP는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세워졌다. 1925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경성운동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종합운동장이었다. 2007년 이 운동장이 철거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큰 논란이 일었다. 발굴된 이간수문과 한양도성 유적은 지하에 보존되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성곽, 일제강점기 운동장, 그리고 21세기 디자인 플라자가 한 장소에 공존하는 독특한 시간의 층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지상의 DDP는 과거와의 시각적 연속성을 완전히 단절하고, 오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급진적 선택을 했다. 개관 초기 DDP는 “5000억 원짜리 목적 없는 공공건축”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는 달라졌다.

 

2015년 뉴욕타임스는 DDP를 ‘꼭 가봐야 할 세계 명소 52곳’ 중 하나로 선정했고, 개관 1년 만에 주변 상권 매출이 15~25% 증가했다. 2025년 상반기에는 누적 방문객 1,000만 명을 돌파하며 서울의 대표 관광 명소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서울패션위크, MAMA, BTS 주제전,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 등 국제적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리며, DDP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서울의 창조 산업을 대표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2016년 자하 하디드가 세상을 떠나면서 DDP는 그녀의 마지막 완성작이자 유작으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과거를 품은 재생, 송산 문화창의지구의 유기적 진화

 

타이베이 신이구에 위치한 송산 문화창의지구는 DDP와는 전혀 다른 철학으로 탄생했다. 1937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대만총독부 전매국 송산 담배공장’은 당시 대만 최초의 전문 담배 공장이었다. 1998년 생산을 중단한 이 공장은 2001년 타이베이시 정부에 의해 도시의 99번째 문화유산지구로 지정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2011년 11월 15일, 6.6헥타르의 부지가 송산 문화창의지구로 공식 개장했다. 주목할 점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며 용도만 전환했다는 것이다. ‘일본 초기 근대주의’ 양식의 건축물은 수평선과 단순한 고전 형태, 세련된 세공 기법을 강조한다. 8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견고하고 아름다운 이 건물들은 전시장,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숍, 카페, 서점 등으로 재활용되며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송산 문화창의지구의 가장 큰 특징은 ‘공업 마을(Industrial Village)’ 개념이다. 원래 담배공장 시절부터 적용된 이 개념은 생산 라인 바로 옆에 근로자들의 편의시설을 배치한 선구적인 디자인이었다. 현재 대규모 야외 공간과 중정은 바로크 정원, 생태 연못, 산책로로 재탄생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다. 공원 내에는 대만디자인센터가 입주해 있고, 2014년에는 아시아 지역 최초의 미국창의혁신센터가 설립되었다. 에슬라이트 스펙트럼 송얀은 서점, 쇼핑몰, 호텔이 결합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지하에는 국제 예술 영화 상영관과 작은 아트 갤러리까지 갖추고 있다. 류리 공팡은 중국 고대 유리 공예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유리 예술 갤러리로, 전통 공예와 현대 디자인의 만남을 보여준다. 공원에는 ‘송산담배공장송비’라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1949년 작사가 허지하오가 작사한 이 비석은 송산 문화창의지구가 단순히 건물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정신까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도시, 두 가지 디자인 철학

 

DDP와 송산 문화창의지구를 비교하면, 동아시아 도시들이 문화유산과 현대화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서울은 과거를 지하에 묻고 지상에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급진적 단절’을 선택했다. 반면 타이베이는 과거의 껍데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내부만 새롭게 채우는 ‘보존적 재생’을 택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DDP의 급진성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역동성과 미래지향적 에너지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자하 하디드의 곡선은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와 끊임없는 혁신을 건축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송산 문화창의지구의 보존적 접근은 대만 사회가 가진 역사에 대한 존중과 유기적 성장의 가치를 보여준다. 오래된 담배 공장 건물은 그 자체로 대만 근대화의 역사를 증언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현대적 창조 활동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만들어낸다.

 

두 공간의 차이는 건축 외관에서도 극명하다. DDP는 어디서 찍어도 ‘미래’를 연상시킨다. 은빛 알루미늄 패널과 부드러운 곡선은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밤이 되면 서울라이트 프로젝트로 DDP의 외벽이 거대한 캔버스가 되어 다양한 미디어 아트를 선보인다. 반면 송산 문화창의지구는 어디서 찍어도 ‘역사’가 묻어난다. 붉은 벽돌 건물, 녹슨 철제 창문틀, 오래된 나무들은 타이베이의 과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 디자인 마켓, 패션쇼는 이 공간이 결코 박제된 과거가 아님을 증명한다. 흥미롭게도 두 공간 모두 초기에는 비슷한 비판을 받았다. “막대한 예산 낭비”, “주변 상권과의 부조화”, “시민 의견 수렴 부족” 등이 공통적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공간 모두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디자인이 도시를 바꾼다

 

DDP와 송산 문화창의지구는 모두 디자인의 힘을 증명한다. 디자인은 단순히 건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며,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DDP의 곡선은 서울을 세계적인 디자인 도시로 각인시켰고, 송산 문화창의지구의 보존된 벽돌은 타이베이를 역사와 창조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2025년 현재, 동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이 자신만의 문화 창조 공간을 만들고 있다. 베이징의 798 예술구, 상하이의 M50 창의원구, 도쿄의 롯폰기 힐스 등이 그 예다. 하지만 각 도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 보존과 혁신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다.

 

서울의 DDP가 미래를 향해 과감하게 도약했다면, 타이베이의 송산 문화창의지구는 과거를 발판 삼아 천천히 진화했다. 두 공간 모두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의미는 다르다. DDP는 ‘변화의 용기’를, 송산은 ‘보존의 지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21세기 도시가 필요로 하는 가치다. 당신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DDP의 곡선 아래 서서 미래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타이베이를 방문한다면 송산 문화창의지구의 오래된 벽돌을 만지며 과거를 되새겨보라. 두 경험 모두 디자인이 어떻게 도시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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