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포브랜드 최예나 대표
강남역 환승 통로를 걸어가는 당신. 2호선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빠르게 움직인다. 양옆 디지털 광고판에서 수십 개의 브랜드가 스쳐 지나간다. 화장품, 배달앱, 패션 브랜드, 금융 상품.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의식적으로"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한 달 뒤, 올리브영 매대 앞에서 당신은 멈칫한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그 제품. "어디서 봤더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손은 이미 그 제품을 집어 들었다. 이건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나의 경험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나만의 경험일까? 내가 처음 산 그 물건. 어디서 봤을까? 왜 낯설지 않을까? 이건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프라이밍 효과의 무서운 힘이다. 최근 한 뷰티 브랜드의 지하철 광고 캠페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 팀은 흥미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지하철 광고를 '보고' 있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적으로 보지 않는 광고가 정말 효과가 있을까?" 답은 놀라웠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인간의 뇌는 초당 약 1,100만 비트의 정보를 처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정보는 고작 40비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부 무의식 영역으로 들어가 조용히 저장된다. 강남역 환승 통로의 그 3초, 당신의 의식은 "빨리 가야 해"에 집중했지만 뇌는 이미 광고판의 브랜드 로고, 컬러, 메시지를 스캔하고 저장했다.
이것이 바로 프라이밍 효과(Priming Effect)다. 먼저 노출된 자극이 나중의 판단과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 심리학자 존 바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특정 단어나 이미지에 노출된 후, 그와 관련된 개념을 더 빠르게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중요한 건, 본인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하루 평균 250만 명이 이용한다. 삼성역에서 강남역까지 3분, 그 사이 평균 12개의 디지털 광고판을 스쳐 지나간다. 각 광고당 노출 시간은 0.8초. 겨우 1초도 안 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0.8초가 한 달 뒤 당신의 구매 결정을 바꿔놓는다. 퇴근길 지하철. 당신은 피곤에 지쳐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회사 단톡방의 잡담, SNS 피드를 무심코 스크롤한다. 의식은 화면에 집중하지만, 주변 시야로 들어온 배민 특유의 타이포그래피. 퇴근 시간. 뇌는 자동으로 연결한다. '배민 = 저녁'. 배고픔은 이미 시작됐다.

당신은 그 광고를 '봤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의 뇌는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다. "저녁 뭐 먹지?" 핸드폰을 든다. 홈 화면의 앱들이 눈에 들어온다. 손가락은 주저 없이 배민을 터치한다. 왜? 당신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익숙해서", "자주 쓰니까", "습관적으로".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방금 전 지하철에서, 당신의 뇌는 이미 "저녁 = 배민"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놓았다. 의식이 개입하기도 전에, 무의식이 선택을 끝냈다. 배달의민족의 전략은 정교하다. 그들은 퇴근 시간 6시부터 8시 사이, 주요 역에만 광고를 집중 배치한다. 사람들이 "오늘 저녁 뭐 먹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간. 그리고 광고는 절대 음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치킨 사진, 피자 이미지는 오히려 역효과다. 왜냐하면 "치킨이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광고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맥락을 판다. "저녁"이라는 시간, "배민"이라는 브랜드, 그들만의 타이포그라피 감각. 이 세 가지가 반복적으로 연결되면, 뇌는 자연스럽게 "저녁 = 배민"이라는 공식을 만든다. 이것이 맥락적 프라이밍이다. 특정 맥락(퇴근 후 저녁 시간)에서 특정 브랜드를 반복 노출시켜, 그 맥락이 다시 나타났을 때 자동적으로 그 브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 당신은 2주 동안 매일 그 글씨체를 봤다. 의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배민 광고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는 달랐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맥락에서 14번의 노출. 무의식은 이미 학습을 완료했다. 성수동 거리를 걷는다. 당신은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산책 중이다. 갑자기 한 매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젠틀몬스터. 쇼윈도에는 안경이 없다. 대신 거대한 은색 구체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알 수 없는 형태의 조각들이 부유한다. 당신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왜? 모르겠다. 그냥 끌렸다.
3주 전으로 돌아가보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인스타 피드를 스크롤한다. 내가 좋아하는 인플루언서가 젠틀몬스터 매장에 다녀온 포스팅이 올라온다. 초현실적인 인테리어, 강렬한 보라빛 조명,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브제들. 안경보다 공간이 더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0.5초 동안 그 이미지를 보며 "저기 어디지?" 생각했다. 그리고 스크롤을 넘겼다. 잊었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다. 젠틀몬스터의 전략은 배민과 정반대다. 배민이 명확한 메시지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면, 젠틀몬스터는 '불완전한 인지'를 만든다. 뇌는 완결되지 않은 정보를 싫어한다. "이게 뭐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그 질문은 무의식에 계속 남아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부른다. 완결되지 않은 과업이 완결된 과업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현상.
당신은 3주 동안 그 공간을 7번 봤다. 다른 인플루언서들도, 친구의 스토리에도 젠틀몬스터가 등장했다. 매번 "저기 어디지?" 싶었지만, 곧 잊었다. 하지만 뇌는 그 '불완전함'을 계속 기억했다. 그리고 성수동 거리에서 실제 매장을 마주쳤을 때, 발걸음이 멈춘다. 당신은 그 궁금증이 3주 전 피드에서 왔다는 걸 모른다. 그냥 "호기심"이라고만 느낀다. 매장에 들어가면, 피드에서 봤던 그 초현실적 분위기가 펼쳐진다. 이 순간, 뇌는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불완전했던 정보가 완결되는 순간,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건 단순한 쇼핑이 아니다. 뇌가 3주 동안 기다려온 '답'을 찾은 순간이다. 프라이밍 효과가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는 광고에 영향 받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정보는 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무의식에 저장된다.
디자이너로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단순히 '눈에 띄는' 비주얼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에 스며드는 요소들이다. 배민의 특유한 타이포그래피처럼 명확한 브랜드 시그니처를 만들 것인가, 젠틀몬스터의 불완전함처럼 궁금증을 남길 것인가. 전략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순간의 노출로 무의식에 각인되는 것.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1회 노출은 무의식에 흔적만 남긴다. 하지만 2주 동안 매일 같은 브랜드에 노출되면, 그 흔적은 '기억'이 된다. 심지어 본인은 그 브랜드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뇌는 이미 그것을 '익숙한 것'으로 분류해놓는다. 프라이밍 효과를 이해하면, 우리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디자이너라면 더 전략적인 광고를 만들 수 있다. 명확한 메시지로 맥락을 연결할 것인지, 불완전한 이미지로 호기심을 남길 것인지. 소비자라면 자신의 무의식적 선택을 인지하고 좀 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다음 번 지하철을 탈 때, 한 번 의식적으로 광고판을 봐보자. 어떤 브랜드가, 어떤 색감이, 어떤 메시지가 반복되는지. 그리고 한 달 뒤, 당신이 무엇을 구매하는지 관찰해보자. 이미 선택은 끝났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뇌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