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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변리사

특허법인 하나 상표/디자인팀 파트너

 

 

 


 

 

 

요즘 디자인의 큰 화두 중 하나가 '오래 쓰기'다. 버리는 대신 고치고, 분해해서 새 물건으로 다시 만드는 업사이클링과 리사이클링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생긴다. 낡은 명품 가방을 뜯어 작은 가방이나 지갑으로 새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브랜드 로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떨까. 주인은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라 좋아하지만, 브랜드 입장은 다르다. 자기 로고가 붙은 제품이 마음대로 뜯기고 바뀌는 게 달가울 리 없다. 내가 산 물건을 내 맘대로 고칠 자유와, 자기 이름이 붙은 물건을 끝까지 관리하려는 브랜드의 권리. 이 둘이 부딪친 사건에 대해 2026년 2월 26일 대법원 판결(2024다311181)이 하나의 새로운 답을 내놓았다. '내가 산 물건을 어디까지 바꿔도 되는가', 그리고 지식재산의 오래된 원칙인 '권리 소진'의 경계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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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Alteration @Sudsides >

 

 

 

권리 소진: 한 번 팔리면 거기서 끝

 

먼저 '권리 소진'이라는 개념부터 짚자.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간단하다. 브랜드가 자기 상표를 붙인 상품을 한 번 정식으로 팔고 나면, 그 물건에 대한 상표권은 거기서 '소진'된다. 효력을 다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 물건을 자유롭게 쓰고, 중고로 되팔고, 고치고, 바꿀 수 있다. 브랜드는 팔 때 이미 제값을 받았으니, 그 뒤로 그 물건을 어떻게 쓰든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폼이나 업사이클링이 가능한 법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후지필름 사건

 

물론 무조건 다 되는 건 아니다. 2003년 대법원의 '후지필름 사건'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어떤 업자가 다 쓰고 버려진 일회용 카메라를 모아, 빈 몸체에 필름을 새로 넣고 포장만 바꿔 자기 상표를 붙여 팔았다. 그런데 카메라 몸체에는 'FUJIFILM'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법원은 이걸 상표권 침해로 봤다. 이유는 이렇다. 원래 물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손을 대면, 그건 고친 게 아니라 사실상 '새 제품을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다 쓴 일회용 카메라에 필름을 다시 채워 파는 건 단순 수리가 아니라 새 상품을 만든 셈이라는 얘기이며, 권리가 소진된 이전 상품과 달리, 새 상품은 권리 침해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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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FUJIFILM QuickSnap >

 

 

 

같은 가위질, 다른 결론: 2026년 대법원

 

그렇다면 명품 가방을 뜯어 지갑으로 만드는 것도 '새 제품 생산'일까. 놀랍게도 대법원은 2026년 2월, 후지필름 때와 다른 새로운 결론을 냈다. 우선 대법원은 이 행위를 '리폼(alteration, customizing 또는 upcycling)'으로 지칭하며,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 경우라도, 그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오직 개인적으로 쓰는 데 그친다면, 로고가 남아 있어도 상표법이 말하는 '상표의 사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상표”를 사용한다는 건 원래 물건이 “시장”에서 거래 · 유통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결국 시장에 나오지 않는 개인적 리폼은 처음부터 상표권이 닿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대법원이 판단의 근거로 '지속가능성'을 직접 언급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리폼이 대개 버리는 대신 재활용(recycling)이나 새활용(upcycling)으로 물건을 더 오래 쓰려는 행위라는 점을 짚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소유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권리, 표현의 자유 뿐만 아니라, '자원을 다시 쓰는 환경적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가 함께 걸려 있다고 봤다. 그러니 상표권을 어디까지 보호할지는 브랜드의 이익만 볼 게 아니라 이런 가치들도 같이 저울에 올려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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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Re:Assign 2017 @Park Seon Min >

 

 

 

그래서 디자이너는 무얼 조심해야 할까?

 

이 판결은 요즘 세계가 주목하는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와도 같은 방향이다. 유럽연합은 2024년 수리권 지침을 만들어, 보증 기간이 끝난 뒤에도 제조사가 부품과 수리 정보를 제공하도록 했다(회원국은 2026년까지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 여러 주에도 비슷한 법이 있다. 핵심은 하나다. 내가 산 물건을 얼마나 오래 쓸지를, 만든 회사가 끝까지 쥐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디자이너라면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좋은 명분이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후지필름 사건이 보여주듯, 남의 상표가 남아 있는 재료를 재활용해 '내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파는 순간, 그 업사이클링은 지식재산권 침해라는 영역에 노출될 수 있다. 이번 판결에서도 해당업자가 리폼을 주도해 자기 제품처럼 유통시킨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침해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한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정리하면 경계선은 두 가지다. 원래 물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꿨는가, 그리고 그걸 시장에 내다 파는가. 지속가능성은 분명 좋은 가치지만, 남의 지식재산을 가져다 내 돈벌이로 바꾸는 일은 결국 그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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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MWO, Mathilde Wittock >

 

 

 

조각보의 마음

 

사실 버린 걸 이어 붙여 새 쓸모를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조각보가 그렇다.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을 버리지 않고 한 조각씩 이어 보자기로 만든, 오래된 살림의 지혜다. 물건을 끝까지 아끼고, 남은 것에 새 쓰임과 멋을 더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요즘의 업사이클링도 결국 그 마음과 닿아 있다. 다만 조각보가 좋은 건, 그게 남의 이름을 빌려 파는 상품이 아니라 내 손으로 만든 '내 물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산 물건을 내 식대로 바꿔 쓰는 건 자유다. 하지만 그게 남의 브랜드를 달고 시장에 나가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자이너는 가치의 중심속에서 행동하는 주체이지만, 타인의 지식재산권에 대해서도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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