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언제까지 직접 내 손으로 점과 선을 빚어낼 수 있을까?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아가며 연차가 쌓이고 연륜이 깊어질 때쯤 모든 디자이너는 예외 없이 날카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내가 직접 스케치북을 쥐고 디자인을 구현하는 ‘Doing(수행)’의 자리에 계속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조직의 거시적 방향성을 잡고 조율하며 전체 판을 짜는 ‘Leading(리더십)’의 역할로 완전히 옷을 갈아입을 것인가. 디자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와 순수한 조형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이 갈림길은 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지독한 고뇌의 연속이다. 디자이너라면 끝까지 현역으로서 'Doing'하며 마우스를 쥐고 있어야 진짜 디자이너가 아닌가 하는 순수한 로망과, 조직의 생태계 안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생존하기 위해 'Leading'의 책무를 맡아야만 한다는 현실적인 압박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느끼는 즉각적인 희열을 포기하고 회의실 테이블에서 보이지 않는 논리와 인간관계를 조율하는 자리로 옮겨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오랜 정체성을 일부 떼어내야 하는 통증을 동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손의 숙련도와 정교한 시각화. 우리는 ‘Doing’ 하는 디자이너에 머물러 있는가
< 이미지 출처 : Hybrid Design at Porsche Design >
물론 이 두 가지 포지션에 절대적인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건강한 디자인 생태계 안에서는 이 두 부류의 디자이너가 반드시 대등하게 공존해야만 한다. 오랜 세월 현업에서 갈고 닦은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의 정점에서 시각적 직관과 장인정신을 발휘해 프로젝트의 최종 퀄리티를 최전선에서 하드캐리하는 'Doing’의 거장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언어나 시스템 뒤로 숨지 않고 오직 압도적인 조형적 결과물로써 실무진들을 이끌고 영감을 준다. 반면, 조직의 구성원들이 각자 어떤 강점과 결핍을 가졌는지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그들이 최상의 시너지를 발휘해 복잡한 비즈니스 문제를 완수할 수 있도록 무대 뒤에서 인적, 물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Leading'의 아키텍트 역시 조직의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개별 픽셀의 아름다움보다 거대한 생태계의 흐름을 먼저 읽어내는 이들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조형도 결국 시장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커리어의 패러다임 전환. 스스로 직접 디자인할 것인가,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인가
< 이미지 출처 : Austin Distel on Unsplash >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현역의 최전선에서 날 선 감각으로 호흡하는 'Doing’하는 디자이너로 영원히 남고 싶었다. 밤을 새워 완성한 내 손끝의 시각적 결과물과 정교한 3D 데이터만이 나라는 디자이너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언어이자 가장 순수한 권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툴을 능숙하게 다루며 복잡한 곡선을 매끄럽게 뽑아낼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디자이너만의 고유한 훈장이었다. 하지만 실무의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겪고 거대한 기업 조직의 생리와 자본주의 시장의 냉혹한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직업인 디자이너의 종착지를 목격하면서 나는 중요한 삶의 역설과 마주하게 되었다. 결국 조직 안에서, 그리고 시장이라는 거대한 전장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며 오랫동안 살아남는 강력한 생명력은 단순히 디자인 툴만 잘 다루고 시각화만 잘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고 세련된 결과물을 내는 역량은 물론 기본적으로 튼튼하게 받쳐줘야 하지만, 그것이 커리어의 유일한 무기가 되는 순간 디자이너의 수명은 급격하게 단축된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늘 스스로의 디자인 수명이 어디까지인지 불안해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다루는 소프트웨어 툴은 매년 더 직관적이고 강력하게 업데이트되며, 유행하는 트렌드는 빛의 속도로 변하고, 날카로운 감각과 지치지 않는 체력을 무기로 삼은 주니어 디자이너들은 끊임없이 뒤를 바짝 추격해 온다. 이 냉혹한 생태계에서 디자이너의 유통기한을 영원으로 늘려주는 진짜 무기는 다름 아닌 조직을 향한 'Leadership(리더쉽)'과 프로젝트를 대하는 'Ownership(오너십)'이다. 내 모니터 너머에 있는 조직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타 부서의 엔지니어나 기획자들과 유연하게 어우러지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프로젝트의 시작점부터 마침표까지 책임을 지는 오너십을 발휘하는 디자이너만이 그 어떤 기술적 변화에도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생명력을 쥐게 된다. 아무리 감각이 뛰어난 주니어라도 조직의 생리를 읽고 비즈니스의 방향성을 책임지는 오너십의 영역은 단숨에 베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디자인 감각의 최정점에 서서 순수한 조형의 미학을 빚어내는 실행자의 역할 또한 반드시 필요하지만, 내가 커리어의 어느 시점에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어떤 역할이 지금의 내 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타고난 내면적 성향과 성격,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커리어의 종착지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안목 등 복합적인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인생의 고차방정식이다. 누군가는 평생을 ‘Doing’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Leading’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짜 잠재력을 만개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에 등 떠밀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포지션을 정의하는 일이다.

Sam Altman OpenAI DevDay 2025. AI시대 디자이너의 생명력은 조직을 리드하고 시스템을 코디네이트하는 역량에 달렸다
2026년 현재, 생성형 AI가 디자이너들의 고유 영토라 여겨졌던 정교한 시각화와 'Doing'의 영역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하고 있는 이 서늘한 시점에는 더더욱 ‘Leading’의 가치가 절실해진다. 단순한 가이드라인과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쳐내는 실행자들의 자리는 이미 인공지능의 연산 속도 뒤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인간의 숙련도를 압도하는 근미래의 디자인 씬에서, 전체 비즈니스의 맥락을 장악하고 사람의 마음과 조직을 움직여 진짜 가치를 창출해내는 'Leading 하는 디자이너'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을 발휘할 것이다. 툴을 움직이는 손의 속도가 평준화된 시대. 우리가 스스로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연마해야 할 최종 무기는 픽셀을 정교하게 제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조직을 이끄는 위대한 리더십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목격하고 있고, 또 확신하는 근미래 디자이너의 필연적인 생존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