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혁 | ASIA DESIGN PRIZE 미디어 편집장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교수
2026년 대만 디자인을 읽는 중요한 출발점은 ‘일상의 관계’다. ‘2026–2027 아시아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가 분석한 대만 수상작에서는 가족의 생활과 사용자의 돌봄, 지역의 기억을 구체적인 공간과 제품으로 연결하는 접근이 두드러진다.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작품들이 반복해서 바라보는 지점은 비슷하다. 사람은 공간 안에서 어떻게 만나고, 사물은 사용자의 행동을 어떻게 돕고, 오래된 지역의 기억은 오늘의 생활과 어떻게 다시 연결되는가. 결국 대만 수상작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물과 공간의 형태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다.

이러한 특징은 이미지 데이터에서도 흥미롭게 드러난다. 대만 수상작 이미지를 AI로 텍스트화해 얻은 프롬프트에서 빈도가 높은 단어는 room(261), space(180), wall(139), modern(128), large(124), area(114), white(98), side(82), interior(82), overall(76) 순으로 나타났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room’이다. space보다 room의 빈도가 높다는 사실은 분석 대상 작품에서 추상적인 공간보다 사람이 실제로 생활하는 구체적인 ‘방’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단어의 빈도만으로 가족이나 돌봄, 소통의 의미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품 설명과 실제 공간 구성을 함께 살펴보면 이 단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진다. 여러 주거 프로젝트에서 방은 단순히 면적을 나누는 단위가 아니라 가족과 반려동물이 함께 움직이고 머물며 관계를 만드는 생활의 단위로 등장한다.
‘wall’의 높은 빈도도 흥미롭다. 우리는 벽을 흔히 공간을 나누는 경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대만의 여러 주거 프로젝트에서 벽은 단순히 막는 장치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수납과 전시, 빛의 조절, 프라이버시 확보, 동선의 연결까지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벽 하나가 여러 기능을 맡으면 별도의 가구와 칸막이를 줄일 수 있고, 그만큼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은 넓어진다. 가족과 반려동물의 움직임도 보다 유연해진다. 결국 방과 벽이라는 익숙한 요소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조율하는 능동적인 장치로 다시 해석되는 것이다. 리포트는 이러한 흐름을 세 가지 개념으로 정리한다. Relational Room, Care Interface, Regenerative Locality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세 개념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된다. 디자인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지역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더 잘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가.

< Hidden Light, ASIA DESIGN PRIZE 2026 WINNER >
첫 번째는 Relational Room이다. 여기서 방은 독립된 기능의 단위가 아니라 ‘관계가 흐르는 생활 시스템’으로 이해된다. 여러 주거 프로젝트에서 거실과 주방, 다이닝, 서재는 고정된 칸막이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중앙 아일랜드와 슬라이딩 도어, 반개방형 서재, 양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순환 동선이 서로 다른 공간을 하나의 생활 흐름으로 연결한다. 특히 아일랜드 테이블은 단순히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 가구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누군가는 일을 하며, 가족은 대화를 나누고 아이를 돌본다. 한 개의 가구가 여러 사람의 행동이 만나는 관계의 중심축이 되는 셈이다.
반려 동물을 위한 터널이나 가족 구성원의 서로 다른 취향을 조율하는 침실과 서재, 손님을 맞이하는 오픈형 다이닝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공간이 먼저 형태를 결정한 뒤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 가족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먼저 상상한다. 아침에 누가 먼저 일어나는가, 누가 어느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는가,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언제인가, 반려동물은 어느 공간을 가장 편안하게 사용하는가. 이런 사소해 보이는 질문이 공간의 배치와 동선을 결정한다. 여기서 디자인은 ‘공간을 예쁘게 만드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람들의 하루를 이해하고, 그 생활의 시나리오를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된다.

< Child Fraud Awareness Program, ASIA DESIGN PRIZE 2026 GOLD WINNER >
두 번째는 Care Interface다. 건강과 안전, 교육처럼 복잡하거나 민감한 문제를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로 바꾸는 디자인이다. [Pee Poo Care]는 신생아의 배변 상태를 부모가 기록하고 의료 상담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CFT Patch]는 온도 변화에 따라 색이 달라지도록 설계해, 고온에서 약물이 지나치게 빠르게 흡수될 수 있는 위험을 사용자가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Child Fraud Awareness Program]은 아동 대상 사기 예방이라는 무거운 사회적 문제를 멀티미디어 교육과 스낵 패키지 협업으로 풀어낸다. [ARKVO Fang Yuan Air Water Dispenser]는 공기 정화와 제습, 공기 중 수분을 활용한 식수 생산 기능을 하나의 작은 시스템 안에 통합한다.
겉으로 보면 이 제품과 프로젝트들은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사용자가 더 쉽게 이해하고, 더 안전하게 판단하며,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사용자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좋은 인터페이스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Care Interface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복잡성이 아니라 그 복잡성을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경험으로 바꾸었는가다. 약물 패치의 색이 위험을 알려주고, 배변 기록이 부모와 의료진의 대화를 돕고, 교육용 그래픽이 아이의 주의를 환기한다. 여기에서 돌봄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정보와 행동을 연결하는 구체적인 설계가 된다.

< Eternal Heart Lantern, ASIA DESIGN PRIZE 2026 WINNER >
세 번째는 Regenerative Locality다. 지역의 기억과 기존 자원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오늘의 경험과 새로운 쓰임으로 되돌리는 흐름이다. [Hotel BEGINS]는 과거 화력발전소와 노동자 숙소에 남아 있던 기억을 현대적인 호텔 경험으로 전환한다. [Quemoy memory]는 진먼 지역의 서양식 가옥을 기록하고 이를 팝업북과 문화상품, 디지털 미디어로 확장한다. [Eternal Heart Lantern]은 사용을 마친 전력 설비의 도자 절연체를 촛대로 재활용해 종교 의례와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연결한다. [Ooyster]는 굴 껍데기와 해조 젤을 활용한 양식 구조물에 파력발전 기능을 결합하고, 수명을 다한 이후에는 다시 해양 생물의 서식 기반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이 사례에서 ‘재생’은 오래된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발전소의 기억은 호텔이라는 새로운 공간 경험으로 이어지고, 옛 가옥의 기록은 한 권의 팝업북이 되며, 버려질 수 있었던 전력 설비의 부품은 다시 한 점의 촛대로 돌아온다. 디자인은 새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방식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의미와 쓰임을 다시 발견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무엇을 다시 사용하고, 누가 그것을 경험하며, 어떤 가치가 새롭게 만들어지는가다.
세 가지 흐름을 나란히 놓고 보면 대만 디자인의 특징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들은 거대한 담론을 먼저 꺼내기보다 생활의 작은 단위에서 출발한다. 한 가족이 식탁에 모이는 방식, 한 부모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오래된 건물의 흔적을 다시 사용하는 방법처럼 구체적인 장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디자인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사용자의 행동과 관계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했는가다. 한 사람의 움직임을 제대로 이해하면 공간이 달라지고, 작은 위험 신호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면 제품의 역할이 달라지며, 한 지역의 오래된 기억을 새로운 경험으로 바꾸면 장소의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왜 이런 관계 중심의 접근이 대만 디자인에서 두드러지는 것일까. 수상작 분석만으로 그 사회적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작품들이 대응하고 있는 생활 조건을 살펴보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한정된 주거 공간 안에서 휴식과 작업, 식사와 돌봄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고, 한 가족 안에서도 세대와 생활 습관, 신체적 조건에 따라 필요한 공간과 정보가 달라진다. 여기에 반려동물이라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도 들어온다. 반려묘를 위한 터널이나 사람과 반려동물의 이동을 함께 고려한 공간은 단순한 ‘펫 트렌드’의 반영을 넘어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이 디자인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Wooden Nook Cafe, ASIA DESIGN PRIZE 2026 WINNER >
지역의 기억을 바라보는 태도도 비슷하다. 오래된 장소와 건축, 사용을 마친 부품을 제거해야 할 과거로만 보지 않고 현재의 자원으로 다시 해석한다. [Wooden Nook Café]처럼 오래된 벽돌과 목재 구조를 활용해 장소의 과거와 현재의 쓰임을 연결하는 사례도 있다. 작은 공간이라도 재료의 이력과 사람들이 머무는 경험을 세심하게 조율하면 분명한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 관계 중심의 디자인은 자본과 규모보다 장소가 사람의 일상과 어떤 연결을 만들어내는지를 먼저 묻는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역할도 달라진다. 디자이너는 더 이상 완성된 형태 하나를 제안하는 사람에 머물기 어렵다. 가족의 생활을 이해하고,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하며, 지역이 가진 기억과 운영 조건을 함께 살펴야 한다. 서로 다른 요구가 충돌할 때 그것을 조율하는 일도 디자인의 일부가 된다. 결국 디자이너는 사물을 설계하는 사람인 동시에 관계가 작동하는 조건을 설계하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흐름은 대만만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Care-Driven Function과 대만의 Care Interface는 건강과 돌봄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연결되고, 일본의 Material Memory와 대만의 Regenerative Locality는 재료와 지역 자원에 축적된 시간을 현재의 가치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홍콩의 Civic Wisdom Design이 공공 공간에서의 경험과 사유에 주목한다면, 대만의 Relational Room은 보다 사적인 주거 공간 안에서 사람들의 생활과 상호작용을 들여다본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모두 디자인이 사물의 형태를 넘어 사람의 경험과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향하고 있다. 대만 디자인에서 ‘관계’는 거창한 추상어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의 배치가 되고, 벽의 기능이 되며, 위험을 알려주는 작은 색의 변화가 된다. 때로는 오래된 건물의 흔적이 되고, 버려질 뻔한 한 조각의 부품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은 결국 이러한 작은 요소들을 연결해 사람들의 생활을 조금 더 잘 작동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