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영 | 디자인소리 대표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K-디자인 어워드> 파운더
브랜드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제품과 아름다운 디자인,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정작 브랜드를 오랜 시간 운영한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어제보다 고객이 얼마나 늘었는지, 어떤 서비스가 가장 많은 수익을 만들었는지, 고객은 왜 떠났는지는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창의성이지만, 브랜드를 지속시키는 것은 숫자다. 많은 창작자는 숫자를 보면 창의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엑셀과 그래프는 디자이너와 거리가 먼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숫자는 창의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언어다. 감각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숫자는 그 방향이 옳은지를 확인해 준다.

< 이미지 출처 : Dollar Shave Club >
미국의 면도기 브랜드 Dollar Shave Club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면도기 시장은 거대한 글로벌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광고비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창업자들은 다른 숫자에 집중했다. 고객 한 명을 확보하는 비용보다, 그 고객이 장기간 만들어내는 가치가 더 크다면 브랜드는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일회성 판매 대신 정기 구독 모델을 도입했고, 고객이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서비스 경험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이 판매한 것은 단순한 면도기가 아니라 고객과의 지속적인 관계였다. 그 결과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했고, 2016년 유니레버는 Dollar Shave Club을 약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들의 경쟁력은 광고비가 아니라 숫자를 이해하는 능력이었다.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바쁜 일은 계속 늘어난다.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고객을 응대하고, 협업을 진행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지나간다. 문제는 바쁜 것과 성장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 숫자를 기록하지 않는 브랜드는 무엇이 효과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은 쓰지만 경험은 남지 않는다. 반대로 숫자를 기록하는 브랜드는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선택을 한다. 작은 개선이 반복되면서 브랜드의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Shopify 역시 숫자를 중심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Shopify는 단순히 입점 기업 수를 늘리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판매자가 얼마나 오래 플랫폼을 이용하는지, 어떤 기능이 실제 매출 증가에 기여하는지, 어느 시점에서 서비스를 이탈하는지를 지속적으로 분석했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때도 직관보다 데이터를 먼저 확인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한다고 추측하기보다 실제 행동을 관찰한 것이다. Shopify는 직감보다 데이터를, 추측보다 행동을 믿었다. 이러한 반복적인 측정과 개선이 Shopify를 수백만 개의 브랜드가 사용하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시켰다.
작은 브랜드에게 필요한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월 매출과 순이익, 반복 구매율, 고객 확보 비용, 프로젝트별 수익성 정도만 꾸준히 기록해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복잡한 재무제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어떤 일이 시간만 소비하는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숫자는 돈을 계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다. AI 시대에는 숫자의 의미가 더욱 커지고 있다. AI는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숫자를 중요하게 볼 것인지는 여전히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조회 수만 높다고 좋은 브랜드는 아니다. 방문자가 많아도 고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반대로 적은 고객이라도 꾸준히 다시 찾아온다면 그 숫자는 브랜드의 미래를 말해준다. 100명이 한 번 오는 가게보다 한 명이 100번 오는 가게를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숫자를 선택하는 일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실행하고, 실행한 결과는 반드시 숫자로 확인한다. 성공은 반복하고 실패는 수정해야 한다. 감각과 데이터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더 나은 의사결정을 만드는 두 개의 축이다. 슈퍼 마이크로 브랜드에게 숫자는 규모를 키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브랜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기준이다. 숫자를 꾸준히 기록하는 브랜드는 문제를 빨리 발견하고, 더 현명하게 선택하며, 더 오래 성장한다. 반대로 숫자를 외면하는 브랜드는 감각에만 의존한 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좋은 브랜드는 아름다운 디자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객을 이해하고, 시장을 읽고, 자신의 선택을 검증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비로소 브랜드는 단단해진다. 숫자는 창의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가장 객관적인 언어다. 직감은 때때로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오래가는 브랜드는 직감을 믿되, 언제나 숫자로 배우고 숫자로 검증하는 브랜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