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혁 | ASIA DESIGN PRIZE 미디어 편집장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교수
2026년 한국 디자인에서 가장 주목할 변화는 디자인의 대상이 제품에서 경험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디자이너들은 제품의 형태와 기능만 완성하지 않는다. 제품이 놓이는 공간, 사용자가 이동하는 방식, 정보를 읽는 순서, 빛과 소리가 만드는 분위기까지 함께 디자인한다. 『2026–2027 아시아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의 한국 수상작 데이터는 이러한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수상작의 상위 10개 어휘는 white(559), text(540), design(384), wall(368), side(344), black(325), room(313), modern(299), left(279), right(266)다. white와 text가 각각 500회 이상 등장한 것은 한국 수상작에서 흰색 배경과 텍스트 중심의 정보 구성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wall, room, side, left, right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 점도 중요하다. 분석의 중심이 개별 제품보다 제품이 배치된 공간과 사용 장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한국 디자인이 그래픽, 공간, 제품을 분리된 분야로 다루기보다 하나의 사용자 경험으로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포트는 이를 Brand as Place, Lumen Form Making, Living Heritage, Care Driven Function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네 키워드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디자인의 성과를 보기 좋은 형태가 아니라 사용자가 실제로 보고, 이동하고, 선택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 PARK OASIS, ASIA DESIGN PRIZE 2026 DESIGN OF THE YEAR >
첫 번째 흐름인 Brand as Place는 브랜드가 로고와 그래픽을 넘어 공간 경험으로 확장되는 현상이다. ADP Design of the Year로 선정된 [PARK OASIS]는 주거 단지와 공공 공원, 기업 브랜드를 두 개의 동심원 구조로 연결했다. 이 구조는 시각적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방문자의 이동을 유도하고, 공원과 주거 공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며, 브랜드를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공간의 운영 방식과 사용자 동선에 반영된 사례다.

< Sushi Sou Quiet Density and Pure Presence, ASIA DESIGN PRIZE 2026 GRAND PRIZE >

< FIABA NEST showroom, ASIA DESIGN PRIZE 2026 GOLD WINNER >
Sushi Sou Quiet Density and Pure Presence와 FIABA NEST 쇼룸도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두 공간은 로고를 반복해서 노출하기보다 재료, 조명, 가구 배치, 이동 경로를 일관되게 구성한다. 사용자는 별도의 설명을 읽지 않아도 브랜드가 추구하는 분위기와 서비스 수준을 경험한다. 오늘날의 공간 브랜딩에서 중요한 것은 브랜드를 얼마나 많이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브랜드의 기준을 공간 전체에 얼마나 일관되게 적용하느냐다.
두 번째 흐름인 Lumen Form Making은 조명을 장식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핵심 요소로 활용한다. 한국 수상작 설명에 side, right, left, visible, scene이 자주 등장한 것은 제품의 정면 이미지보다 공간 전체와 시선의 이동이 중요하게 다뤄졌다는 뜻이다. 조명은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뿐 아니라 입구를 찾게 하고, 이동 방향을 알려주며, 공간의 체류 시간을 조절한다. 밝기와 반사, 그림자의 차이가 공간의 기능과 분위기를 동시에 바꾸는 것이다. 리테일 공간에서 이러한 접근은 마케팅 성과와도 연결된다. 조명은 고객의 시선을 특정 제품으로 유도하고, 구역별 분위기를 구분하며, 브랜드가 의도한 촬영 환경을 만든다. 제품 디자인에서도 표면의 반사와 상태 표시 조명은 사용자가 제품의 작동 여부를 빠르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빛은 형태를 꾸미는 요소가 아니라 정보 전달과 행동 유도를 담당하는 인터페이스가 되고 있다.
세 번째 흐름인 Living Heritage는 전통 요소를 현대 생활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한옥의 구조나 전통 문양처럼 알아보기 쉬운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수상작은 전통을 직접 보여주기보다 제품의 사용 방식, 비례, 재료, 색상에 반영한다. 전통적 이미지를 강조하기보다 현대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다.

< CUCHEN IH Pressure Rice Cooker, ASIA DESIGN PRIZE 2026 GRAND PRIZE >
CUCHEN IH 압력밥솥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밥솥은 한국의 식생활과 밀접한 제품이지만, 전통 문양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한국적 디자인이 되지는 않는다. 이 제품은 조작부를 단순화하고, 주방에 안정적으로 어울리는 형태와 색상을 적용해 일상적인 사용성을 높였다. 전통을 시각적 장식으로 소비하기보다 오늘날의 생활 방식에 맞는 제품 경험으로 전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네 번째 흐름인 Care Driven Function은 기능의 수보다 사용 과정의 편의와 안전을 우선하는 디자인이다. 영아용 공기청정기, 의료 인터페이스, 생활 가전은 사용자가 실수하기 쉬운 지점을 줄이고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확인하도록 돕는다. 버튼의 위치, 화면의 정보 순서, 손이 닿는 범위, 청소와 관리 방법까지 사용 경험의 일부로 다룬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이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건강과 안전, 유지 관리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네 가지 흐름은 한국 디자인이 제품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품 자체의 완성도는 여전히 기본이다. 그러나 사용자는 제품만 보지 않는다. 어디에서 제품을 접하는지, 정보를 얼마나 쉽게 이해하는지, 공간 안에서 어떻게 이동하는지, 사용 후 관리가 편리한지까지 함께 평가한다. 디자인의 경쟁력도 개별 결과물의 형태보다 여러 접점을 얼마나 일관되게 연결하는가에서 결정된다. 한국에서 이러한 변화가 빠르게 나타난 첫 번째 이유는 도시와 산업의 변화 속도다. 새로운 매장과 서비스, 디지털 플랫폼이 빠르게 등장하면서 제품과 공간의 교체 주기도 짧아졌다. 기업은 하나의 결과물을 오래 유지하기보다 다양한 접점에서 같은 브랜드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에 따라 디자이너의 역할도 제품을 만드는 데서 브랜드 공간, 디지털 인터페이스, 서비스 운영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 소비자의 높은 기대 수준이다. 소비자는 제품을 구매할 때 기능과 가격뿐 아니라 공간과의 조화, 사용 편의, 브랜드 이미지, 온라인 콘텐츠로 공유했을 때의 모습까지 고려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제품, 패키지, 매장, 앱, 고객 서비스의 품질이 서로 다르면 브랜드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한국 디자인이 여러 분야를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하는 이유는 이러한 소비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이유는 K 콘텐츠의 확산이다. K 팝과 드라마, 음식이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면서 한국 디자인도 한국적인 경험을 시각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전통 요소를 단순히 반복하는 방식이 아니다. 해외 사용자도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으면서, 한국 브랜드만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PARK OASIS의 공간 구성, Sushi Sou의 절제된 인테리어, CUCHEN의 사용 중심 제품 디자인은 한국적 특성을 현대적인 경험으로 전달한다.
이 변화는 한국 디자인의 국제적 위치에도 영향을 준다. 과거 한국 디자인의 강점이 해외 트렌드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현지 시장에 적용하는 능력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제안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ADP 2026 데이터셋의 절반 가까이 한국 수상작이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변화의 규모를 보여준다. 다만 수상작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 공간, 제품, 서비스에서 공통된 방향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결국 2026년 한국 디자인의 핵심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사용자가 무엇을 경험하는가’에 있다. 브랜드는 공간에서 경험되고, 조명은 시선과 행동을 유도하며, 전통은 현대적인 사용 방식으로 바뀌고, 기능은 편의와 안전을 높인다. 한국 디자인은 제품 하나의 완성도를 넘어 사용자의 일상 전체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디자인이 세계 시장에서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이고 경쟁력 있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