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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25 총감독 최수신 교수

 

 

 

"디자인은 질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더 커졌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디자인 무대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머뭇거린다. 정체성 없는 추격자에서, 새로운 아젠다를 제시하는 선도자로 넘어가기 위해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25의 총감독 최수신 교수는 그 물음에 “질문을 설계할 수 있는 힘”이라고 답한다. 최 교수는 SCAD(사바나 예술대학)에서 디자인 교육의 중심을 지켜온 교육자이자, 미국 자동차 디자인 씬에서 활약해온 실무자다. 그가 주도하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25의 키워드는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 ADP와 함께 아시아 디자인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는 이 대담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세계 디자인 담론에 대한 선명한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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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디자인 교육과 산업을 이끌어오신 입장에서, 지금 왜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ADP)’ 같은 범아시아 디자인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보나요?

 

디자인이라는 영역은 오랫동안 서구 중심의 미학과 산업 논리를 기반으로 구축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경제, 문화, 기술의 중심축이 점차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디자인 역시 그 축의 이동에 맞춰 새롭게 해석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는 수천 년의 문화 유산과 감성의 다양성을 품고 있는 거대한 맥락의 집합체입니다.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나는 디자인 언어와 태도, 철학을 전 세계에 발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지금 반드시 필요합니다. ADP는 단순히 수상작을 선정하는 어워드를 넘어, 아시아 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관을 발굴하고 조명하며, 그것을 하나의 '대화의 장'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거점이 될 수 있습니다. 플랫폼이라는 것은 단지 무언가를 보여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의미를 구성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참여자들이 ‘질문’과 ‘응답’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구조화된 담론의 무대여야 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ADP의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시아 내부의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범아시아라는 이름은 하나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연결하는 유연한 틀이어야 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 국가들은 각기 다른 미적 가치와 사회적 코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한데 모아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디자인 언어로 조율하는 일은 매우 도전적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ADP는 이 차이를 단순히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차이들 사이에서 어떤 공명과 융합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ADP가 결과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질문을 나누고 그 질문이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아시아 디자인’이라는 말 속에 감춰진 정체성과 가능성을 진정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며, ADP는 그 중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위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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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25의 주제는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입니다. 이 주제를 정하신 배경에는 어떤 디자인적·사회문화적 고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가 아시아 디자인의 미래 방향성과 어떻게 맞닿아 있다고 보는지요?

 

이번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인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는 단순한 수사나 감상적인 표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마주한 가장 절실한 과제이자 디자인이 다가가야 할 본질적인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통해 ‘포용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보다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소외된 이들을 위한 착한 디자인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시장과 정책, 문화와 기술이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연결의 언어로서 디자인을 재조명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디자인은 산업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 다뤄져 왔습니다. 효율성과 매출, 트렌드 대응 능력으로 평가받아온 디자인은 자칫 인간 중심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시장 중심의 기술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빅터 파파넥과 같은 디자이너들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지만, 여전히 기업이나 교육기관, 디자이너 다수에게 ‘포용’은 부차적인 윤리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저는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그 인식을 뒤집고 싶었습니다. 포용디자인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시혜적 디자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의 삶’을 설계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이, 성별, 국적, 신체 조건, 정보 접근성 등 모든 차이를 전제로 삼고, 그 차이를 통합해 하나의 디자인 경험을 만드는 것이 바로 포용입니다. 디자인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산업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광주라는 도시를 주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광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민주주의와 평등, 연대와 포용의 정신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무등’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말하듯, 누구도 높거나 낮지 않다는 철학이 이 도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정신 위에 디자인을 놓아보고 싶었습니다. 한국이 세계 디자인 담론에서 보다 중심적인 역할을 하려면, 기술과 형태를 넘어선 철학과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너라는 세계’는 그런 점에서 지금 아시아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감성적 확장, 정체성의 탐색, 그리고 글로벌 연대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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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라는 도시, 그리고 ‘비엔날레’라는 형식은 포용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디자이너들이 많지만,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총감독님께서 보시는 ‘아시아 디자인의 DNA’는 무엇이며, 어떻게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광주라는 도시는 단순히 지리적 개념을 넘어, 시대정신과 인간성의 가치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무등산이라는 이름이 말하듯이, 귀하고 천함이 따로 없고 누구도 위아래를 나눌 수 없다는 철학이 이곳의 뿌리에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철학이야말로 디자인이 회복해야 할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위한 구조와 언어가 되어야 한다면, 광주라는 장소야말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무대입니다. 광주는 디자인의 도시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수하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저는 광주의 정신, 즉 무등산이 상징하는 수평적 가치와 공동체 정신을 디자인 언어로 번역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국 아시아 디자인의 정체성을 다시 바라보는 여정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아시아 디자인의 DNA는 단일한 코드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아시아는 오히려 수많은 문화와 가치가 끊임없이 교차하고 혼종되며 진화해 온 ‘거대한 문화의 융합지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 디자인은 특정한 형태나 스타일보다, ‘태도’와 ‘관점’에서 정체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아시아 디자인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첫째는 인간 중심성입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디자인은 늘 사람의 삶, 감정,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둘째는 유연성입니다. 다양한 외부 문화를 흡수하고 소화하면서도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는 방식은 서구의 이분법적 구조와는 다른 독창성을 만들어냅니다. 셋째는 감성적 통합입니다. 기능과 미, 전통과 현대, 자연과 인공을 분리하지 않고 조화시키는 능력은 아시아 디자인이 가진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의 디자인은 그 정체성이 여전히 명확하게 표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속도의 문화’에서 찾습니다. 한국은 짧은 시간 내에 산업화와 정보화를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디자인 역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잘 만드는 것과 정체성을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용기, 그리고 ‘한국 디자인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깊이 있게 파고드는 일입니다. 그 질문의 출발점은 기술도, 형태도 아닌 바로 철학이어야 합니다. 광주와 무등산이 그러하듯, 수평적 가치,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 다름을 포용하는 태도가 한국 디자인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빠르게 따라잡는 fast follower가 아니라, 새로운 담론과 언어를 설계하는 agenda setter로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출발을 디자인 비엔날레와 ADP 같은 플랫폼이 열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디자인 산업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Fast Follower’로 불리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독창적인 정체성을 갖춘 창의적 리더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디자이너나 교육기관, 플랫폼이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선 저는 'Fast Follower'라는 개념이 한국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 국가의 디자인 생태계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잘 따라가는 능력’에 초점을 둔 문화이자 전략이었습니다. 사실 이 전략은 산업 초기에 효율성과 속도를 무기로 시장에서 성과를 내는 데 있어 매우 유효했습니다. 한국의 IT, 가전, 자동차 산업이 빠르게 세계적인 위치에 올라선 것도 이 전략의 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자인이란 단순히 ‘더 낫게’가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속도보다 방향, 따라잡는 것보다 앞서 물음을 던지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디자인 교육과 산업은 그동안 성과 중심적 가치에 무게를 두어 왔습니다. 학교에서는 취업 중심의 포트폴리오가 우선시되고, 산업계에서는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제품, 더 쉽게 소비될 수 있는 서비스가 우선되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힘보다는, 주어진 문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태도가 장기적으로는 창의성과 정체성을 소진시킨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디자인이라도, 그것이 다음 제품보다 '조금 더 좋을 뿐'이라면 곧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Agenda Setter’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거나 파격적인 형식을 제안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디자인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감정과 문제를 해석하고 있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꾸준히 던지고, 이에 대한 태도와 언어를 지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자세입니다.

 

교육기관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훈련의 장이 되어야 하고, 학생들에게는 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깊이 있게 구성하는 사고력을 길러줘야 합니다. 디자인 플랫폼, 특히 ADP와 같은 국제 어워드는 이런 질문의 경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잘 만든 디자인에 상을 주는 것을 넘어, 지금 디자이너와 기업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담론을 제안하고, 그 담론에 가장 선명하게 응답한 작업을 조명해야 합니다. 저는 ADP가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매우 유의미한 플랫폼이라고 봅니다. ADP는 범아시아의 감성과 철학, 사회적 맥락을 집약해낸 수많은 디자인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금의 디자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단할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축적은 단지 결과의 목록이 아니라, 창의성의 지형도를 구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앞으로 아시아가 진정한 창의적 리더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기술, 더 세련된 형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느리더라도 더 깊은 사유, 더 단단한 가치, 그리고 더 설득력 있는 철학을 디자인에 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산업계와 학계, 그리고 어워드 플랫폼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질문을 설계하고, 함께 새로운 언어를 모색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협업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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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는 제11회로, 깊이 있는 축적을 이룬 시점입니다. 올해 비엔날레의 가장 주목할 지점이나 전략적 차별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2025년 제11회를 맞이하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는 단순한 반복의 시점이 아니라, '재정의'의 시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축적을 바탕으로, 이제는 전시의 형식과 본질 자체를 다시 묻는 전환점에 서 있는 셈입니다. 과거 만국박람회가 그 시대의 국제적 소통을 위한 플랫폼이었다면, 21세기의 디자인비엔날레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질문의 구조를 재편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온라인에서 수많은 이미지와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시는 더 이상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광주디자인비엔날레는 바로 그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가장 큰 전략적 차별점은 ‘디자인을 재정의하는 힘’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전시의 주제를 단순히 컨셉 차원의 문장으로 소비하지 않고, 사회적 현실, 기술적 진보, 철학적 담론이 유기적으로 얽힌 총체적 질문으로 구성했습니다.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라는 주제는 바로 그 총체성의 표제이자 방향성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전시의 '다중적 관점' 구조입니다. 이번 비엔날레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일반 시민, 산업계, 정책입안자, 교육기관 등 다양한 주체가 각자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전시 경험을 다층적으로 설계하고자 했습니다. 즉,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경험하게 만드는’ 구조로 변환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상자 중심의 수동적 전시에서 사용자 중심의 능동적 참여 전시로의 전환은, 디자인비엔날레가 포용성과 인간 중심성을 논의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절과 불신, 기술 불균형과 가치의 파편화가 극심해지는 지금, 디자인은 단지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의미 있는 접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비엔날레가 바로 그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실험은 광주라는 장소에서 시작되기에 더욱 설득력을 가집니다. 무등산의 이름처럼, 누구도 우위에 있지 않고, 모두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는 광주의 정신은 지금 디자인이 회복해야 할 가치와 정면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디자인을 통해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연결할 수 있는 언어는 무엇인가?', '포용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가?', '기술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11회를 맞이한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던지는 가장 전략적이고 의미 있는 제안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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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P에서는 ‘Senterface’, ‘Neoditional’ 같은 신조어로 아시아 디자인 트렌드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총감독님이 제안하고 싶은 아시아 디자인의 새로운 언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신조어를 통한 트렌드 해석은 명확하고도 인상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입니다. 특히 ‘Senterface’나 ‘Neoditional’ 같은 조어는 하나의 단어로 복합적인 개념과 감각을 응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다층적이고 맥락의존적인 언어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조어는 새로운 시선과 인식을 일깨우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합니다. ADP가 매년 시도하고 있는 이러한 언어 실험은 분명히 트렌드를 구조화하고 기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신조어를 다시 꺼내어 사용하고 있는가? 또, 이 언어들이 단발적 유행어로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특히 한국이나 중국처럼 기술과 문화 소비 속도가 빠른 국가에서는 하나의 키워드가 잠깐 주목을 받았다가도 금세 잊혀지는 현상이 뚜렷합니다.

 

웰빙, 융합,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단어들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책 사업의 핵심어로 쓰였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신조어의 유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응축하고 있는 철학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기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해마다 새로운 신조어를 생산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디자인이 장기적으로 품어야 할 ‘지속 가능한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 동서양의 자연관 차이를 빌어 설명하곤 합니다. 서양이 자연을 정복(conquering the nature)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면, 동양은 자연과 공존(exist with nature)하려는 철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처럼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관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라면 아시아 디자인의 새로운 언어를 제안하기보다, 아시아 디자인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세계관을 되살리는 작업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공명(共鳴, resonance)’이라는 개념은 매우 동양적인 철학이자 디자인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공명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함께 진동하는 관계의 감각을 뜻합니다. 디자인 역시 사용자와의 공명을 통해 감동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앞으로 아시아 디자인이 ‘공명’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핵심 가치로 삼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언어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유행이 아닌 철학에서 나올 때 비로소 지속성을 가집니다. 신조어는 디자인을 구조화하는 도구로 유효하되, 그것을 만드는 행위 자체보다, 그 언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정신과 문화적 감수성이 더 중요합니다. ADP와 같은 플랫폼이 해마다 주제어를 제시한다면, 단순히 새로움을 겨냥하기보다, 그 언어가 다루고 있는 본질이 무엇이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삶과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언어는 사라지지 않고, 쌓이고, 전승되는 디자인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활약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디자인' 하면 연상되는 고유성이 약하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총감독님이 보시기에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 혹은 강점은 어디에서 출발할 수 있을까요?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 문제는 단순히 표현 양식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왜 디자인을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영향 아래에서 디자인을 수용하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을 빠르게 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은 전략적으로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었지만, 동시에 그 본질적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는 고유한 감수성과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다다익선’, ‘이왕이면 다홍치마’, ‘짜고 맵고 시고 단’ 등 복합적이고 풍부한 감각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디자인에도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또한 ‘오지랖’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공동체적 관심과 배려의 문화는 다른 문화권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감성의 형태입니다. 이러한 특유의 ‘감각의 풍요로움’은 K-pop이나 K-drama처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콘텐츠의 저변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자산이 디자인의 본질과 철학으로 구조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기술력과 성능 중심의 시장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빠르게 만들고,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성과지향’의 패러다임은 디자이너가 새로운 아젠다를 제시하기보다는, 주어진 과제를 잘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곧 디자인의 정체성 부재로 이어졌고, 한국 디자인이 국제 무대에서 ‘보편적이지만 독창성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디자인이 그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경주마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시간 말입니다. 디자인 교육 현장에서는 단지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산업계 역시 시장의 요구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철학과 사회적 책임을 염두에 둔 디자인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디자인 어워드 플랫폼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ADP 같은 국제 플랫폼이 한국 디자인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탐구하고 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축적된 담론이 자연스럽게 정체성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디자인 정체성이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질문과 실험, 실패와 통찰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여정의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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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께서는 과거 자동차 산업에서 국내 주요 브랜드의 디자인 전략에 깊이 관여해 오셨습니다. 이번 광주디자인비엔날레와 ADP의 담론 속에 ‘자동차 디자인’의 경험은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자동차 디자인은 단순한 제품 디자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동성과 감성,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복합적인 설계 작업이죠. 저는 자동차 디자인을 통해 항상 ‘형태의 아름다움’보다는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중심에 두고 일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자동차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의 포용적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영역입니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25의 주제인 '너라는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자동차 디자인과 통합니다. 자동차는 철저하게 '너'를 위한 공간입니다. 디자인은 물리적 형상 이전에, 감정의 반응과 기억의 장치입니다. 제가 수년간 경험한 자동차 디자인은 그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보여주었고, 그래서 이번 비엔날레에서도 기술과 감성을 연결하는 다양한 시도를 담고자 했습니다.

 

특히 ADP의 ‘Legacy Beyond Asia’라는 메시지를 자동차라는 상징에 비유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자동차는 단일 기계가 아니라, 문화적 코드의 총합이자 시대정신을 담는 캡슐입니다. 그렇기에 아시아 디자인이 세계 무대에서 남겨야 할 유산이란, 단지 예쁜 외형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이동성, 어떤 감각, 어떤 관계성을 추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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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P MEDIA의 슬로건인 ‘Legacy Beyond Asia’는 단순히 심미적 디자인이 아닌, 정체성 있는 디자인 언어의 확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시아 국가들은 디자인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Legacy Beyond Asia’라는 슬로건은 단순히 지역적 범주를 넘어서는 야심 있는 비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에서 출발한 디자인이 그저 트렌드의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디자인의 방향성과 기준을 재정립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저는 이 슬로건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디자인이 갖는 문화적 책임과 철학적 지향을 담아내는 구조적 메시지로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아시아는 더 이상 세계 디자인의 주변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 감성, 사회적 전환의 중심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일회성 유행으로 소비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 지속 가능한 가치로 전승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저는 그 답이 ‘정체성’과 ‘관계성’이라는 두 단어에 있다고 봅니다. 정체성이란 나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고, 관계성이란 그것이 타인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은 시대를 기록하는 언어이며, 세대를 이어주는 문법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유산은 ‘형태’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입니다. 즉, 무엇을 디자인했는가보다, 왜 그렇게 디자인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철학과 근거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문화로서의 디자인이고, 교육으로서의 디자인이며, 궁극적으로는 유산으로 남는 디자인입니다. ADP가 지향하는 ‘Legacy Beyond Asia’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이 플랫폼이 단지 수상작을 뽑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이 설계한 디자인의 ‘맥락’과 ‘철학’을 다시 설명하게 하고, 그것을 세계와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어워드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디자인은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은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는 플랫폼이 바로 ADP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이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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