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최종우 교수. ffd랩 디렉터
전) 영국 맥라렌 시니어 제품운송 디자이너, 로지텍MX 시리즈 제품 수석 디자이너
우리는 흔히 디자이너를 무(無)에서 유(유)를 만들어내는 창조주와 같은 존재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것은 세상에 없던 원리를 발견하는 발명가의 영역이지 디자인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산업디자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어떤 위대한 결과물도 완벽한 공백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적은 없었다. 디자이너는 철저하게 이미 존재하는 세상을 관찰하고 관습적인 형태를 모방하며 그 안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제거해 발전시키는 조율자에 가깝다. 디자인은 혁명적인 창조가 아니라 끈질기고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이다.

< 이미지 출처 : Vitra Design Museum >
수없이 많은 모방과 개선을 반복하며 사물의 쓸모를 극한으로 최적화하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 디자이너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언가를 덧붙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것을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소거해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절제력을 요구한다. 디자인을 정의하는데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는 나에게 디자인이란 결국 더하는 기술이 아니라 본질을 남기기 위해 나머지를 소거해가는 정제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Steve Jobs’ uniform became part of Apple’s brand DNA: sleek, simple and timeless
< 이미지 출처 ㅣ Arabian Business >
의사결정의 엔트로피를 다스리는 법
스티브 잡스가 생전 매일 같이 입었던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는 미니멀리즘이 가진 전략적 가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는 세상의 시각적 요소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가졌음에도 정작 자신의 외형에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핵심 동력인 의사결정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극단적인 효율화였다. 인간의 뇌가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인지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을지 고민하는 사소한 선택들이 에너지를 갉아먹으면 정작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잡스는 자신을 둘러싼 형식적인 노이즈를 걷어냄으로써 확보한 여백을 진짜 세상에 필요한 디자인에 쏟아부었다.
미니멀리스트 디자이너에게 일상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곧 직업적 날카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 방식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1의 상태로 수렴시킬수록 사물이 가진 본연의 비례와 소재의 미세한 질감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디자인의 가치를 포착하려는 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부터 투명하게 비워내야 한다. 시야를 가리는 심리적 노이즈가 사라져야만 비로소 모방해야 할 정답과 발전시켜야 할 핵심이 보이기 때문이다.
'순정'이라는 종착지
우리는 무언가를 처음 소유했을 때 그것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과거 아이폰 사용자들이 제조사가 설계한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 탈옥(Jailbreak)을 감행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스템 폰트를 바꾸고 아이콘을 화려하게 덧칠하며 제조사가 허용하지 않는 기능을 억지로 주입한다. 이것은 얼핏 개성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사물의 원형을 훼손하는 과잉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화려한 튜닝 끝에 대다수의 사용자가 결국 도착하는 종착역이 제조사가 처음 내놓은 상태인 오리지널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 순정으로의 회귀는 산업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시사한다. 순정 상태는 단순히 처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의 일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과 고통스러운 토론 끝에 도출해낸 최적의 균형점이다. 탈옥이라는 저항과 커스터마이징이라는 자아 표출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우리는 깨닫는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강력하며 억지로 꾸며낸 개성보다 본질에 충실한 기본값이 가장 오래간다는 진리를 말이다. 디자인의 끝은 결국 순정이라는 말은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목적지가 사물이 가져야 할 가장 정직하고 본질적인 상태임을 증명한다.
큐레이터가 된 소비자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물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건을 대단히 신중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소유물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단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 비용을 지불한다. 시중에는 좋은 제품이 넘쳐나지만 사용자의 삶과 완벽하게 합치되는 본질적인 제품은 극히 드물다. 미니멀리스트 디자이너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그 사물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근거를 해부하듯 파고든다. 이 물건이 나의 능력을 진정으로 확장해 주는지 혹은 10년 뒤에도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묻는다. 우리는 그것을 타임리스(Timeless)디자인 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가혹한 필터를 통과한 소수의 물건만이 나의 공간을 점유할 권리를 얻는다.
나에게 물건을 선택하는 행위는 곧 나의 철학을 투명하게 투영하는 과정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디자이너이자 소비자로서 나는 물건 하나를 들일 때마다 날 선 신중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모든 기준을 통과해 깊은 설렘을 주는 물건을 마주할 때 나는 디자이너로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최근의 폴스타(Polestar)가 보여주는 행보가 대표적이다. 화려한 장식이나 강박적인 물리 버튼을 과감히 덜어내고 오직 본질적인 주행 경험과 정제된 미학에만 집중한 그 간결함을 볼 때 나는 디자이너로서의 전율과 소비자로서의 설렘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 설렘은 단순한 소유욕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사물이 뿜어내는 본질적인 에너지에 대한 깊은 공명이다. 사실 폴스타가 현업 디자이너들이 가장 선호하고 많이 타는 차량이라는 점을 통계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설처럼 통하는 이야기다. 필자 역시 폴스타를 운행하며 그 본질적인 가치를 직접 경험하고 있기에 이 현상에 깊이 공감한다. 화려함보다 본질을 꿰뚫는 그들의 언어가 동종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이미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Rear view of Polestar 4 electric SUV
< 이미지 출처 : Designboom >
산업디자이너가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선 직업적 정직함의 발로다. 화려한 껍데기로 본질적인 결함을 가리는 디자인이 시장에서 얼마나 빨리 소모되고 쓰레기로 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처절하게 본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비우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사투다. 잡스가 자신의 에너지를 방어했듯 혹은 우리가 아이폰의 순정 상태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듯 디자이너의 미니멀리즘은 세상을 더 명료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나는 오늘도 물건 하나를 고르며 설레고 그 설렘을 바탕으로 다시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나간다. 디자인의 완성은 무언가를 획기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가치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물이 아닌 삶 그 자체를 마주하게 된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에 집중할 때 비로소 디자이너의 감각은 깨어나며 삶은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