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나.jpg

 

비포브랜드 최예나 대표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심사위원

 

 

 


 

 

 

디자이너는 무형을 파는 사람이다. 로고 시안을 몇 개 보여주고, 그중 하나를 골라달라고 말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진짜로 설득해야 하는 건 그 파일 안의 선과 색이 아니다. 왜 이 형태가 지금 이 브랜드에 맞는지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논리와 감각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꽤 무모한 일이다. 만질 수도, 잴 수도 없는 것에 값을 매기고, 그 값을 통째로 설득해야 하니까.

 

 

 

700책표지.jpg

< 이미지 출처 : yes24 >

 

 

 

그래서 디자이너에게는 결과물 못지않게 중요한 무기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그 무형의 가치를 어떤 말투로, 어떤 표정으로 감싸서 전달하느냐다. 그리고 이건 비단 디자이너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요즘 잘 되는 브랜드들을 뜯어보면, 하나같이 '무형의 가치를 말로 포장하는 법'을 아주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토스를 자주 써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상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계좌를 잘못 입력했을 때도, 잔액이 부족해서 거래가 막혔을 때도, 이 앱은 좀처럼 "안 됩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은행 앱이라면 아마 "처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끊어 말했을 부분에서, 토스는 부정형을 최대한 피하는 쪽을 택했다. 실제 사내 가이드라인은 부정적인 표현을 최소화하도록 하고, 안 된다고 잘라 말하는 대신 "~하면 할 수 있어요"라는 식으로 풀어 말하도록 안내한다. 의미 없는 단어를 걷어내는 작업에는 사내에서 '잡초 제거'라는 이름까지 붙였을 정도다. 이유는 하나다. 금융처럼 원래 차갑고 무거운 영역일수록, 문장 하나가 주는 인상이 그대로 신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700토스 Toss_Logo_Primary.jpg

< 이미지 출처 : toss >

 

 

 

심리학에는 인지적 유창성(Processing Fluency)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 뇌는 처리하기 쉬운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더 진실하고, 더 안전하고, 더 좋아할 만한 것으로 착각한다. 문장이 복잡하면 뇌는 그 내용을 판단하기도 전에 문장을 읽어내는 일 자체에 에너지를 써버리고, 그 피로감은 고스란히 브랜드에 대한 거리감으로 돌아온다. 중고 거래 앱 당근은 이 원리를 한 발 더 밀어붙였다. 신뢰도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아예 '매너온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이웃 간 거래가 몇 도쯤 따뜻한지 숫자로 보여준다. 신뢰라는 무형의 감정을 '따뜻하다'는 촉각적 은유 하나로 통째로 옮겨버린 것이다. 말투 하나가 아니라, 서비스 전체가 하나의 은유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토스가 다정한 조언자처럼 되묻는다면, 당근은 동네 이웃처럼 온도를 나눈다. 같은 재료인 '쉬운 말'로 완전히 다른 두 인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700최예나님 당근.jpg

< 이미지 출처 : 당근마켓 >

 

 

 

여기서 한 가지 반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애플이다. 애플의 카피는 사실 효율만 놓고 보면 군더더기가 많다. "좋아하는 Apple 제품을 구입하는 가장 좋은 방법"처럼, 그냥 "Apple 스토어에서 구매하기"라고 써도 될 자리에 굳이 한 문장을 더 얹는다. 인지적 유창성 이론만 따르면 이건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런데도 애플은 이 방식을 고집한다. 모두가 쉬운 말만 쓰는 시대에, 조금 느리게 읽히는 문장은 오히려 '이 브랜드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처리하기 쉬운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처리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 자체가 '이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여유'라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유창함이 신뢰를 만든다면, 의도된 여백은 격을 만드는 셈이다.

 

 

 

700애플.jpg

< 이미지 출처 : 20Twenty Design >

 

 

 

발표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 같은 슬라이드, 다른 말투

 

이건 사실 내 경험에서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꽤 큰 자리에서 발표를 하다 보면, 종종 청중의 얼굴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보일 때가 있다. 심하면 대놓고 하품을 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늘 같다. '슬라이드가 별로였나, 로직이 약했나.' 그런데 몇 번을 반복해서 겪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문제는 대개 디자인이나 내용이 아니었다. 그 내용을 건네는 내 말투였다. 같은 내용, 같은 슬라이드를 두고도 설명하는 톤을 바꾸는 순간, 청중의 표정이 그 자리에서 바로 달라지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정보를 나열하듯 설명하던 말투를, 마치 옆에서 대화하듯 질문을 던지고 잠깐 멈추는 톤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형의 가치를 파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를 감싸는 말투 자체가 콘텐츠의 일부라는 뜻이다. 슬라이드는 논리를 전달하지만, 말투는 그 논리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결국, 말투도 디자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유창함은 기본값이다. 브랜드의, 그리고 한 사람의 진짜 인격은 그 기본값 위에 무엇을 얹느냐, 혹은 언제 그 기본값을 깨느냐에서 완성된다. UX 라이팅 가이드라인만 베껴서는 우리만의 말투가 생기지 않는다. 쉽게 쓰는 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어떤 얼굴로 말할 것인가는 각자 다른 답을 내려야 한다. 그날 하품을 참지 못했던 청중이 다시 떠오른다. 그들이 흔들렸던 건 슬라이드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로고와 컬러와 폰트로 브랜드를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브랜드를, 그리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익숙해진 그 '말투'일지 모른다. 당신의 다음 발표는, 혹은 당신의 브랜드는 지금 어떤 말투로 말을 걸고 있는가.

  • Founder: Doyoung Kim
  • Business Registration Number: 454-86-01044
  • Copyright © DESIGNSORI Co., Ltd.
Menu